결혼이야기 00 팔고 장가간 남자.
언젠가 한번 꼭 하고 싶었던 말들 이였는데 어떻게 남들에게 비춰질지 몰라 묻어둔 말들을 멍석을 깔아 놓고 놀아보라 하시니 부끄러운 마음 가만히 다독이며 남편 이이야기를 올려 볼까 합니다.
내 나이 24살 엄마와 함께 작은 식당을 하며 4명의 남동생을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에 줄줄이 보내며 뒷바라지 하던 시절 저에게 결혼이란 없었습니다.
그때 김천에서 구미까지 경부고속도로를 한창 공사중이였고 우리식당 바로 앞에 건설회사 숙소가 지어졌습니다.
회사 밥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 식당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한 분이 유심히 절 지켜보시더니 중매를 서시겠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지금 외국에 있다네요.
그냥 장난하는 소리로 들었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몇 개월 후 어느 날 건설회사 사람들이 우리 식당에서 회식을 할 때 까만 피부에 얼굴이 외국사람처럼 윤곽이 뚜렷뚜렷한 한 사람이 고기도 못 먹는다 술도 못 먹는다, 그때 한참 인기 있던 보리음료 한 병을 앞에 두고 커다란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습니다.
회식이 끝난 다음 그 사람은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는데 크지 않은 키에 회사 회사유니폼을 단추를 채우지 않아 가슴에 너무 많은 털이 적나라하게 들어나 있었답니다.
성격이 별난 저는 단정하지 못한 차림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본인의 속옷을 좀 사다달라며 부탁 하는 무례함에 화가 엄청 났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엄마는 남자가 저만한 배짱은 있어야 한다며 그 사람을 예뻐하시더군요.
그 다음날 중매를 서신다는 그 분은 어제 그 사람이 외국에서 들어와 우리 현장에 배치된 사람이라며 저보고 정식으로 사귀어 보라며 그 사람을 인사시켜 주시더군요.
그날부터 그 사람은 무슨 마음을 먹었던지 전혀 고기나 생선을 못 먹는 사람이 남들 삼겹살 구워 먹을때 구역질을 해가며 마늘은 구워먹으며 식당을 드나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조금도 그 사람에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차가운 저의 시선에 언제나 말없이 식당 주위를 맴돌곤 했지요.
어느날엔 전혀 못 먹는 술을 먹고 식당 방에서 삼겹살을 굽는 불판을 베고 잠이 든적도 있었답니다.
설상가상 동료 들이 드나들며 전해주는 말들은 여자가 몇 명이 있었다는 등 외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유흥업소에 간다는 등 노름으로 모두 탕진했다는 등 정말 싫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절 좋아하는 남자들이 자꾸만 생기고 그래도 저는 어린 동생들만을 생각하며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화를 받으니 그 사람 이였어요. 바로 전화를 끊으려 했더니 잠시만 한마디만 할 시간을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곤 저에게 남자가 세상에 00차고 나와서 여자에게 이렇게 수모를 당해보긴 처음이라며 오늘 저녁 한번만 더 기다려 보고 안나오면 보란 듯이 다른 여자를 사귀겠다네요.
전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했습니다. 어떻게 아가씨에게 00차고 태어나서란 말을 서슴없이 하는지...... 충격에서 벗어나니 갑자기 이 남자에의 박력이 매력있더라고요.
그날 밤 엄마를 졸라 바쁜 식당일을 잠시 접고 그 사람을 만나러 나갔습니다.
많은 말을 듣고 좋은 감정이 없던 나에게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솔직하게 털어내더군요.
많은 아가씨를 만나고 사귄건 맞지만 몇 개월 동안 지켜 봤노라며 꼭 당신이여만 된다하더군요.
그리고 우리는 그해겨울 바쁜 식당을 몰래 빠져나가 엄마 속을 무지 태우며 데이트를 했고 결혼을 했답니다.
건설회사에 근무 했던 탓에 산골 오지로만 방을 얻어 다녀야만 했고 잦은 발령으로 살림살이도 가지고 다니지 못하며 궁색한 생활을 해야 했고 어린것들을 데리고 이사를 13번이나 했답니다.
자식과 아내를 끔찍이도 아끼는 남편은 늘 저에게 이런 표현 써되 되는지 모르겠지만 존경의 대상 이였답니다.
부정적인 생각 보다는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가득 찬 남편은 본인 보다는 늘 남 먼저 생각하며 가족들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남편의 생각을 통하면 무엇이든 긍정적인 결론이 내려지곤 했답니다. 저에겐 너무나도 힘겹고 골치 아픈 복잡한 일들도...........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가게 될 나이가 되자 과감히 회사를 나와 지금 사는 이 곳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중학교를 갈 때 까지만 저보고 살림을 하라더군요.
작은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운전도 서투른 저에게 작은 소형차를 한 대를 사주며 지금까지 사무실에 경리를 봐 주시던 분에게 그만두라 하더군요. 전 너무 겁이났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 같은 무식쟁이가 사무실에 나가 무엇을 할수 있을까.
전 그냥 사람을 쓰라며 완강히 거부했고 절 설득하며 용기를 심어주던 남편은 절 결국 사무실에 앉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3년쯤 지나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고 컴퓨터도 어느 정도 다루게 되고 법인 회사인 남편의 회사에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함께 보완하며 도울 수 있는 사업자 하나를 제 앞으로 만들어 주더군요.
건설 경기가 침체되다보니 어느 날부터 남편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보다 제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남편은 만원만 주면 열심히 다녀오겠습니다 하면서 손을 저에게 내밀며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잘 봐달라고 합니다.
너무 모자라 부정적이고 소심하고 자신 없던 저에게 너무나 살맛나고 신나는 사십대를 선물해준 내 남편 부족한 아내의 등에 날개 달기를 마다하지 않던 남편 언제나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봐준 남편 하얗게 머리 흰 남편은 의자에 앉고 저는 주름이 자글자글 호호 할머니 되어 남편을 무릎 앞에 앉아 조잘조잘 거리면 지금처럼 사랑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봐 주며 그렇게 늙어가고 싶습니다.
“여보야 난 당신만나 너무 행복했어 바라는거 없고 당신하테서 미래도 보았고 희망도 보았고 사랑도 보았어 당신만 건강하면 난 다 가졌다.”
남편이 쓰러져 장례치룰 준비까지 생각했던 시간과 구급차의 싸이렌 소리는 10여년이 흐른 지금도 언제나 저를 눈물짓게 합니다.
너무나 작고 여린 나를 믿지 못해 먼길 훌훌털고 가지못하고 다시 돌아온듯한 남편
내옆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그렇게 쌓아온 우물안 개구리의 행복 고마운 남편은 내가 기댈 수 있는 너무나큰 나무랍니다.
뭐든 안돼는 나에게 뭐든 가능하다고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남편 사랑합니다.
오늘도 지쳐 잠든 남편의 넓은 등에 저는 이렇게 써봅니다.
“당신에게 너무 부족한 아내여서 많이 미안해”
아내의 배경이 되기 위해 언제나 희생을 즐거이 감내하는 남편 하얗게 늙어가는 남편의 모습이 참 따뜻 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