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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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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시절 (5)


BY momojaang 2004-09-05

 

부산 초량의 말괄량이가 서울 혜화동에서 기가 죽어가고

있었다.

엄마의 말을 빌리면 서울내기 다마내기란다.

알로 까졌다는 표현일꺼다.

서울은 무서운 곳이었다.

나는 부산이 그리웠다.

다마내기들은 경상도 말을 쓰는 내가 입만 벌리면 까르르

웃어댔다.

곧 이학년이 되어서 학급이 바뀌었는데도 나는 말을 안했다.

저 아이가 일본에서 왔대.

한국말을 못한대.

사정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렇게 쑤근거리기도 했다.

일본에서 온 사람은 아버지일뿐인데 담임선생님은 엄마에게

일본에서 온 아이냐고 물었댄다.

 

친구도 없었다.

아무하고도 놀지 않았다.

나는 말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집에서 기르는 개하고만 놀았다.

개는 나보다도 컸다.

개는 나를 사랑했다.

나도 개를 사랑했다.

우리는 서로 목숨걸고 사랑했다.

개는 유일한 나의 친구였다.

 

언니가 교실문 밖에서 기다려 준다.

언니는 변해가는 동생이 안타깝다.

오학년인 언니는 반에서 제일 컸다.

이상하게 언니는 왕따가 아닌 모양이었다.

언니는 드디어 나의 보호자가 되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둘레둘레 언니를 찾곤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점점 조용한 아이로 둔갑을 하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신경질쟁이가 되기도 했다.

엄마와 언니가 절절매기 시작하고 나는 매맞는 아이에서도

해방되었다.

일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개가 없어졌다.

개를 찾아 헤매던 나는 병이 나고 말았다.

나는 학교도 못 나갈만큼 아팠다.

먹지도 못했다.

몸져 누웠다.

병원에 가도 낫지를 않았다.

내 생애 처음으로 몸져 누운 사건이었다.

일주일이나 결석을 했다.

 

일주일만에 개가 돌아왔다.

어디선가 두드려 맞은 상처를 가득 안고 기진맥진

나를 찾아 돌아왔다.

그날의 눈물겨운 상봉.

나는 그날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나는 털고 학교에 나갈수 있었다.

나는 집착이 강한 아이였나보다.

이별의 절망에 약한 아이였나부다.

 

초등학교 삼학년에 나를 기고 만장하게 만든 사건....

내가 쓴 작문이 히트를 쳤다.

지금도 잊을수 없는 제목.

'나는 쭈리라고 하는 개다.'

학교에서 무슨 상인가 받았다.

그 작문때문에 선생님한테 칭찬을 듣고 아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은후 나는 드디어 서울내기 다마내기 사이에서

서서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나의 유일한 친구 쭈리가 나를 살린셈이다.

나는 문학소녀의 길을 걷기 시작한거다.

타박 타박...

그러면 그렇지 내가...

얼마나 숙성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