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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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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사랑


BY 그림이 2004-08-20

나는 지금 싸이월드를 통해 손녀의 사진을 들여다 보면서 컴퓨터의 혜택을 만끽한다.
예쁘고 앙증스러운 손녀의 수십 컷의 재롱 모습, 자주 찾아 못 뵙는다면서 며느리가 손녀 사진을 싸이월드에 올려놓으면 우리부부는 컴을 열어 들여다 보고 즐거워한다.
' 500년 세월을 함께 살아가는 세대 '라는 직장동료 말이 실감이 난다.
육이오를 기억할 수 있는 우리 세대는 역사 속에 조선시대의 삶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을 살아왔다. 지금은 외국에 나가 사는 친구에게 e-메일로 서로 건강을 걱정을 하고 자녀 근황도 나누는 세상을 살아간다.
  나는 손녀를 안고 '요즘은 돈이 있어야만 할미 노릇도 한다.' 라는 세간의 말을 씁쓸하게 받아드리면서 손녀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물품들을 사본다. 물질로서 정이 이루어진다는게 가족 구성원 간에도 가감없이 통하게 되어버린 세상이 원망스럽다.

 40년이 훨씬 넘은 중학교 때 아버지께서는 "네가 사범학교에 시험에 합격 되면 고등학교를 보내주마. " 라는 약속이 사범학교가 없어지는 바람에 시험을 쳐도 합격 되기가 어려운 나의 꿈은 무산되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신 원서로 시험을 쳐서 나는 여고에 합격이 되었지만 아버지께선 한마디 말씀도 하시지않으셨다.
 
 직장 구하기가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절 고등 학교까지 졸업시켜 시집을 보낸다는 것은 어려운 살림에 엄두가 나지 않으셨는지 진학 대신 소 한 마리를 사줄테니 그리 알아라는 말씀 후 입학금 등록기일은 지나갔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그해, 농사일을 거들면서 틈나는 대로 혼자 진학준비를 했다. 요즘같이 야단스러운 재수가 아닌 그저 시간 나는 대로 호롱불 아래서 잠깐씩 배운 것을 잊지않을 정도로만 했다. 이러한 손녀를 보신 할아버지께서는 어느날 아버지와 나를 함께 사랑방으로 부르셨다. 이유인즉 논을 팔아서라도 나를 고등학교에 보내라는 의외의 말씀이셨다. 신학문을 공부하신 할아버지께선 기울어진 가세에 말 못하고 계시다가 이런 단안을 아버지께 내리셨다.

  다음 해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를 고등학생으로 만들기 위해서 할아버지께선 허술해진 밥상을 탓하지 않으셨고 편찮아 누워계실 때 변변찮은 약 첩도 맘 놓고 못 드신줄을 방학 때 보고 느꼈다.
"할아버지! 꼭 취직이 되면 좋은 음식도 올리고 약도 지어드릴게요." 맘속 다짐을 했건만 할아버지께서는 나의 바램을 뒤로한채 돌아가셨다. 그 얼마 후 나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손녀의 효도 한번 못 받으시고 병환으로 고생하시다 가신 할아버지 소상 때 울고 또 울었다.

  첫 봉급으로, 가족 모두께 괜찮은 옷을 한가지씩 할 수 있었다. 거금으로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 에게 옷을 선물 했다는 건 평생 잊지못할 나의 추억이다. 특히 할머니께서 흐뭇해 하시면서 좋아하시던 그 모습은 지금까지 두고두고 기억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무매독자신 아버지시기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께는 딸같은 손녀였다. 조부모님께서 쏟은 손자손녀 사랑은 부모남 사랑과는 또 다른 사랑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내리신 어려운 결단과 힘든 농사일로 자녀를 뒷바라지해 주신 부모님 덕에 골몰 없이 돈을 벌었고 명예퇴직 후엔 연금까지 받으면서 잘 지내고 있다. ' 딸아이는 공부시키면 못쓴다. ' 는 그 시절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깊은 사랑을 부어주신 나의 할아버지셨다.
 나는 손녀의 소품을 사면서 ' 내 손녀는 나의 사랑을 무엇으로 느낄까? ' 라는 생각이 든다. 점점 영악해져 가는 요즘 아이들. ' 다음엔 할머니께 무엇을 사달라고 할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지 사주실꺼다. ' 라는 깊은 사랑이 아닌 물질로만 나의 사랑을 받아드린다면 너무 슬픈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닐까? 몸소 사랑의 가르침을 심어 주신 나의 할아버지!

40여년전 할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랑을 내손녀도 느낄 수 있는 그런 할머니로 남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