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이 되던해 봄에 어머니를 여윈 나는 엄마에 대한 추억들이 미미하다... 이미 출가한 딸의 손주를 본 어머니는 심장판막증이라는 지병이 있으신 상태에서 막둥이인 나를 출산하시고는 6년여를 병원 문턱을 들락 거리시다가 끝내 이생을 끈을 놓으셨다. 치마만 둘러서 여자란 별호를 가지신 호방한 성품의 외할머니는 무남독녀인 따님집에 사시면서 외손주들의 양육을 도맡아하시며 집안살림살이를 좌지우지 하셨다 . 한동네에 두집 살림을 했는데 나와 외할머니와 큰오빠는 철도관사집에서 소꿉장난처럼 재밌게 살았었다. 역장인 아버지덕에 역앞에 새로 집을 짓고 가게를 차렸었는데 가끔 가겟집에 나가면 어린애 주먹만한 누깔사탕과 박하사탕 그리고 기름종이에 싼 비과와 유과 미루꾸등을 양손가득 쥐고 단것을 입에 물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어린나이에 치아가 절단이 나는게 자명한 사실이었다. 50년대 말이나 60년대초쯤이니 치약이 시중에 변변하게 있는것도 아니려니와 돈이 귀한 시절이라 여간하게 살지 않고서는 치약을 구경조차하기 힘들 세월이었다. 그때 치약대용으로 쓰던 연분홍 파스텔톤의 치분이라는게 있었는데... 입안에 털어 넣으면 은은한 딸기향과 박하향이 나는데 이를 닦은 용도보다는 심심풀이 간식으로 손가락에 찍어 먹던 기억이 아슴프레하다. 치분으로 이를 닦아봐야 거품도 시원찮게 나고.. 락희치약이라고 치약이 있긴 했지만 비교적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산다는 우리집에서도 치분을 사용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금으로 양치를 하는 정도였다. 대학에 다니는 큰오빠는 엄마의 젖도 변변이 물어보지 못하고 자라는 막내동생이 안쓰러웠는지 롤케익이나 다과점빵들을 자주 사다 줬는데 자나깨나 군주전부리를 달고 사는 나는 초등학교 입학하기도전에 치아가 절단이 나 버렸다. 병원생활에 지친 어머니께서 심신을 달래시려고 집에 오셔서 쉬시던 무렵이였다. 마른오징어를 씹어 먹다가 썩은 어금니를 건드려 그만 덧들려 펄펄 뛰면서 나동그라졌다. 역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께서 뛰어 오시고 어머니가 나를 부둥켜안고 달래시고 아버지께서 약방으로 달려가셔서 치통수를 사오셨다. 약솜에다 치통수를 묻혀 충치가 난 이에다 대주시니 땡벌에 쏘인듯 아픈 통증이 잦아 들었다. 잊혀질듯하면 가끔씩 충동질하던 유년의 치통의 추억은 지금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부모님에 대한 간절한 추억 한조각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막둥이로 태어나 부모님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진 못했지만 그래도 내겐 너무나 소중한 부모님을 떠올리면 괜스레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