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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적에 우리 집은 봄, 가을 1년에 2번씩 누에 치기를 했다. 다른집에 비해
제법 많은 누에치기를 했던것 같다. 연례행사였기에 누에치기를 하는 시기면 우리는
바로 옆집 친구네 집에서 묵어야 했다.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했기에 어쩔수가 없었다. 그럴때면 책들하고 옷 몇가지하고
챙겨가지고 바로 옆집에 사는 친구집 비어있는 방에서 우리 식구들은 기거를 했다.
누에는 뽕나무의 잎을 먹고 살기에 뽕잎을 따야하는 일을 누군가가 해야했다.
해마다 꼭 일을 도와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저 너머 윗동네에 사는 태식이 아저씨였다.
말도 못하고 하더라도 뭐라하는지 모를 정도로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하는 분이었다.
태식이 아저씨는 친척집 문간방에서 기거를 했는데 뽕나무잎을 따야하는 시기가
오면 엄마는 아저씨를 부르곤 했다. 집 한쪽 온갖 잡동사니 물건을 쌓아놓은 광이라는
공간이 있었는데 하나 가득히 쌓여있는 뽕나무는 아저씨의 일거리였다.
우리는 그 옆에서 오빠들하고 동생하고 같이 아저씨의 일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전래동요를 누가 잘하나? 순서대로 불렀고 아저씨는 옆에서 무어라 알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면서 노래를 거들어주었다.
그리고 뽕나무에는 오두개라는 작은 열매가 있었다. 약간의 선홍색은 아직 맛이 안들어
시다는 느낌이었고 검붉은색은 정말로 맛이 너무 좋았다.. 아저씨는 꼭 한그릇 모아서
남동생과 나에게 무슨 보물인냥 정성스럽고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알게 모르게 우리 가족들하고 많은 정이 쌓였던것 같다. 그 누구도 사랑을 주지
않은 아저씨를 우리는 식구처럼 대했던것 같다. 엄마는 식사도 절대로 성의없이 주지않았다.
우리가 먹는 반찬가지수로 접시 가득 정성스럽게 차려주었다. 성의껏 차려주는걸 보고 엄마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속깊은 정을 알 수가 있었다.
비록 세상에 적응 못하는 아저씨지만 그래도 한 인간으로 대접했던것 같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일을 도와주는 아저씨에 대한 고마움과 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민의 정이랄까? 표현은 비록 못하지만 식구처럼 생각을 했던것 같다.
멀리 3시간 남짓 산넘어 외갓집 갈때도 어김없이 아저씨는 지게라고 등뒤에
지는곳에 외갓집에 줄 떡이며 과일 그리고 모든 푸성귀를 지게에 지고 갔다. 아무
말없이 일을 도와주는 아저씨를 엄마는 참 고마워했다.
특히 기쁜일이 있을때는 말은 비록 못하지만 지긋이 미소 짓곤 했다.
특히 엄마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마다않고 도와주었던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에 간다고 읍내에 나와 자취할때도 항상 태식이 아저씨 안부를 엄마에게
묻곤 햇다. 아주 어렸을적부터 알고 있었기에 아마 작은 정이 싹텄던것 같다....
무엇하고 지내고 건강은 어떤지 엄마에게 꼭 묻곤 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아저씨가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었다. 나의 어린시절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아무도 와주지않는 마지막 가는길을 정성스럽게 거두워주었다고 한다.
사람과의 정이라면 우리 가족하고나 풀고 갔을 아저씨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비록 말은 잘 못하지만 그 누구도 찾아주지 않고 정을 주지 않는 이승에서의 쓸쓸한 삶!
인간으로서의 누려야할 평범한 인생을 잃어버린 한 인간에의 삶과 죽음앞에서
작은 반딧불 같은 인연이얼정 정말 작은 그 무엇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추억에로의
한 길모퉁이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