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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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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실에 겨울을 넣어둔 아이


BY 남풍 2004-06-25

"엄마, 환이 좀 봐요."

동생의 줄무늬 셔츠를 걷어 올리는 누나의 얼굴이 부쩍 수척하다.

조그만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 동생의 비쩍마른 등 위 투명하게 봉봉 물이 찬 물집이다.

걱정스레 보던 엄마는 또 있냐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던 동생이 바지의 훅크를 풀고, 엉덩이를 내 보인다.

앙상하게 마른 엉덩이 푸르스름한 몽고반점 위로 큰 물집이 하나, 이미 터져버렸다는

다른 하나는 엉덩이 선 깊숙한 곳에 짓이겨져 있다.

"너 똥 쌀 때 아프겠다.'

누나는 애처롭게 동생을 바라 본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병원에 가자는 엄마의 말에 즐겁게 따라 나서는 두 아이,

엄마와의 외출이 그저 즐겁기만 하다.

눅눅한 장마철 오후, 희뿌연 안개기운에 눈이 침침하다.

 

의사는 수두일 가능성도 배제 할 수는 없지만, 두고 보자며 연고 하나를 처방해 줬다.

돌아 오는 길 내내, 뒷좌석의 아이들은 끊임없이 조잘 대는데, 엄마는 흐릿한 날씨마냥

개운치 못하다.

횟집을 한다고, 할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긴 지 1년,

엄마를 부르려면, 아이들은  '할머니.아니..엄마' 하고 불렀고, 아침에 갈아 입을 옷을 들고 있으면, 옆에 있던 할머니는 '오늘은 체육복 입는 날이다'했다.

엄마의 큰 보살핌 없이도 하루 해는 꼬박꼬박 갔고,

1년이 지난 지금, 집에서 엄마의 자리는 아이들 옆에 깔려 있는 이불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한 집에 살면서, 아이들을 보살펴 주는 할머니와 잘 따르는 아이들을 고마워 하면서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나치면서도 엄마에게 들르지 않는 아이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이 엄마를 보러 오면, 엄마 바쁘니 얼른 집에 가라고 등을 떠미니,

일곱살 아이는 '엄마가 제일 좋이 하는 건... 돈'이라했다.

아마도 '엄마는 돈벌러 가서 바쁘니까' 하는 말을 엄마는 자기보다 돈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오늘 보니, 아이들은 많이 자란 것이 분명하건만, 어쩐지 안스러워 보인다.

오랜 만에 아이들 저녁이나 먹여 보내야겠다 생각에

"우리 요리할까?" 했더니 아이들이 먼저 주방으로 달려 들어 간다.

"엄마, 밀가루 반죽 놀이 하고 싶어."

아이의 말에 엄마는 밀가루에 물을 붓고, 손에 붙지 말라고 식용유를 몇방울 떨어 뜨려 주었다.

학교에서 늦게 돌아 온 5학년 딸아이 까지 합세했다.

아이들 앞은 곧 해파리 헤엄치는 바다가 되었다가, 토끼풀 꽃이 핀 풀밭도 되었다가 했다.

플라스틱 방석을 끌어다 놓고, 놀이에 빠진 아이들 입으로 차례차례 밥을 떠 먹인다.

1년 전만 해도 이런 광경은 흔하게 벌어졌건만.... 참으로 오랜만에 아이들과 마주한

시간이 장마철에 만난 햇살같다.

이런 느낌이 그리운 건 아이들만이 아니다.

 

"어서오세요."

주방 밖에서, 놀이의 종료를 알리는 외침이 들려 온다.

아이들은 분주히 손을 씻고, 엄마는 흰 비닐봉지에 아이들이 갖고 놀던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담아주며, 냉동실에 넣어 두면, 다음에 갖고 놀 수 있다 했다.

"엄마, 비밀이 하나 있는데, 엄마에게만 말해 줄까?"하더니

큰 아이는 눈을 반짝 거리며,

"냉동실 문에 겨울에 온 눈을 넣어 놓았다." 했다.

"냉장고 속에 넣어 둔 겨울이라... 그 때의 즐거운 기억까지 생생하게 보관되었겠네."

 

아이들은 차례로 엄마 볼에 에너지 충전뽀뽀를 해주고는 봉지를 흔들며 돌아갔다.

아이들이 가고난 후에도 엄마의 가슴 속엔 아이들의 웃음이 냉동실에 둔 것처럼,

신선하게 보관 되었다.

기억은 지극히 추상적인 것이지만, 어떤 구체적 사물에 저장되고,

그것에 의해 되살아난다.

아이가 저장해 놓은 눈은 아이가 간직하고 싶은 지난 겨울의 즐거운 추억일 것이다.

아이는 오늘, 엄마와 함께 보낸 이 시간도 반죽에 묻혀 같이 보관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아니 어쩌면 날마다, 냉동실 문을 열어 즐거워 하리라.

 

손님 상에 올릴 부침개를 하며, 엄마는 부침개에 묻어 오는 어린 날이 기억났다.

 

그렇게

먼 훗날, 아이들에게 엄마 없는 이 날들은 어떤 기억으로 자리하게 될까.

아이를 내팽개치고, 돈만 좋아 하던 엄마...라고 기억된다는 건 슬픈 일이라고,

엄마는 생각했다.

엄마는 이제부터라도 아이들의 기억의 냉동실에 좋은 모습을 담아 넣을 수 있게

살아야 겠다고

냉장고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