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아멜리노통의 '오후 네시'를 읽어보면 원하지 않는 타인과의 만남이
얼마나 사람을 질리게 하는지 (그 책에서는 정신병적인 집착이지만)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수많은 만남을 갖게 되는데,
그때마다 만남으로의 독특한 느낌은 있을 것이다.
수많은 만남을 갖게 되면서
세상을 살아온 두께만큼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심도 많아지고 넉넉한 포용력을 갖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지만 , 사실과는 다른 말씀이더란 얘기다.
특히, 각자 가정을 이룬 형제자매끼리의 만남은 여전히 편안하고 좋기만 한 것일까?
문화평론가 김지룡씨 말마따라,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레 관계가 형성되어지는 가족이라는 '관계인'과
관계인을 뺀 '타인'으로 나눈다고 할 때, 과연 관계인인 가족간에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것인가, 생각해봤다.
원해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닐지라도 어쨌거나 핏줄과 애정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관계가 과연 모든 것이 이해되고 수용될 수 있는 그런 사이일까?
각자 가정을 이루면서, 공간적인 거리만큼이나 이해하고 포용하고자 하는 마음이 멀어졌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나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도 없을 뿐더러, 그들의 걱정거리를
들어주는 것 또한 답답해진다.
같이 걱정하고, 같이 해결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니 팔 니가 흔들고, 내 팔 내가 흔드는거지.' 이렇게 생각했다가,
이렇게 생각하는게 이기적인 마음이지 않을까 또 다시 힘든 고민의 연속이라니......
사람들이 채팅을 좋아하는 것은, 완벽한 타인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가족간에 나눌 수 없는 솔직한 모습을 보일 수 있고, 어떤 얘기든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란 말씀이지.
내가 줄 수 없는게 많아서 일까, 아니면 받을 수 없는게 많아서 일까?
자꾸만 가족간의 소통이 삐그덕거리고 편안하지 않은 요즈음이다.
서로에게 강제적인 간섭이나 설교를 하지않는,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맺을 수 있는
'관계인', 가족이 새삼 그립다.
give 와 take가 없어도 편안하기만 했던게 '가족'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이제는 가까운 이웃보다 멀리 느껴지는 핏줄이다. 그래서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