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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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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총각과 이쁜 각시 이야기


BY 옛 이야기 2004-05-03

판돌이 아저씨는 우리 동네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남의집에 애기머슴으로 들어가서 궂은 일 을

도맡아 하는 불쌍하지만 착한 청년이었다.

내가 여덟살무렵 스물 대여섯은 되었는데 우리집 건너에 사는 할매네

오두막집에서 방 한칸을 세 얻어서 혼자 살고 있었다.

 

할매는 우리집에 마실을 오면 판돌이 아저씨 칭찬을 잔뜩 늘여 놓았다.

"판돌이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린데이, 아침에 내가 일어나기도전에

마당부터 훤하게 쓸어 놓지러. 내가 기운 없다꼬 물 도 길어 주지러

어중간띠기 아들보다 더 낫다카이. 저런 아가 우예 부모복은 지지리도

못타고 났을꼬.... 참말로 아깝은기라."

 

비록 남의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인물이 반듯하고 심성이 착했다.

지나가다가 어른들을 만나면 깍듯히 인사를 하였고, 어린 우리들 한테도

언제나 웃는 얼굴로 대해 주었다.

특히 나를 보면 언제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귀여워 하였다.

길에서 만나면 삐삐를 꺾어서 주기도 하고, 잠자리도 잡아 주었다.

 

엄마는 이웃 아지매들하고 만나면 판돌이 아저씨 얘기를 자주 하였다.

"세상에 우째 저리 착하고 인물이 반듯하겠노 머슴 살기는 너무 아깝다."

"그러게 팔자가 박복해서 어려서부터 고생을 해서 그렇치 어디 나가마

누가 머슴산다꼬 보겠노."

"누구 참한 색시 있거던 중신 좀 해 주고 싶구만은."

그러다가 그 이듬해인가 참말로 판돌이 아저씨가 장가를 간다고했다.

 

부모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으니 그냥 찬물 떠 놓고 살기로 했다는 말 도

들렸다. 어느날 판돌이 아저씨네를 갔더니 방문 앞에 여자 고무신이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호기심에 방문을 살짝 열어보니 한복을 입은 새색시가

앉아 있다가  놀라며 누구냐고 물었다.

 

괜히 멋적어서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거리자 언니가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

오라고 하였다. 방 안에 들어가보니 예전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였다.

먼저 화사한 이불이 반다지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벽에 아무렇게나 걸어 두었던

옷 들 위에 수를 놓은 가리개가 둘러처져 있었다.

그리고 처음보는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여러개 보였다.

 

언니는 구경 하느라 정신이 없는 나에게 몇살이냐? 집 이 어디냐? 를 물어 보앗다.

그날 이후로 심심하면 언니네 방 에 놀러가서 이것저것 만지며 놀기를 좋아했다.

어떤 날은 들에서 꺾어온 들꽃들이 항아리에 담겨져 있기도 하고 꽃잎들을 말려서

모우기도 하였다. 언니는 말 도 크게 안하고 언제나  웃으며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판돌이 아저씨는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고 언니 혼자 집에 있는 날 이 많았다.

언니는 내가 놀러가면 부침개도 부쳐주고 밥도 함게 먹으며 마치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가끔 엄마가 갖다 주라고하는 음식을 들고 가면 신랑 각시가 방안에서

사이좋게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곤 하였다.

 

한 일년을 그렇게 살다가 그동안 모은 돈으로 시내로 나가서 기술을 배울꺼라며

이사를 가고 말았다. 한동안 어찌나 서운 하던지 그 집 앞에서 서성 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렸던 나도 어느덧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 신혼 살림을 장만할때

나도 모르게 그 언니를 닮아 가는걸 알수가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미는걸 좋아하고, 이쁜게 있으면 사들고 와서 장식 하기를 좋아했다.

어려서 언니가 보여 주었던 취미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게 분명 한것같다.

비록 부모를 일찍 여의고 제대로 교육도 못받고 고생을 한 판돌이 아저씨지만

이쁘고 지혜로운 아내를 만났기에 행복하게 잘 살았으리라 믿는다.

 

남의집 머슴살이 보다 기술을 배우는게 앞으로 훨씬 낫다는 조언을 할 정도면

얼마나 생각이 반듯한지 미루어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게 처음부터 좋다고 끝까지 좋은것이 아니고, 처음에 나쁘다고 끝까지

나쁜것도 아니라는걸 살면서 차차 알게 되었다.

 

부모 밑에서 곱게 자란 사람이 결혼해서는 고생을 있는대로 하는 인생이 있고

부모 복은 없었어도 결혼해서 제대로 대접받으며 사는 인생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도 가끔은 판돌이 아저씨와 언니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을때가 있다.

어린 계집아이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이렇게 남아 있는걸 알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