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추석인가, 결혼하기 석달 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여튼 명절이라
예비시댁에 점심 쯤 해서 인사 드리러 갔다. 맛난 거 먹고, 어머님과 셋이서
고스톱 재미있게 치고 저녁 7시 쯤 되어 이제 예비처가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난데 없이 신랑 친구들이 명절에 술한잔 하자며 눈치 없이 우르르 몰려
왔다. 친구라면 열일 제쳐 두는 이 사람, 기다리고 계신 예비 처가는 생각도
못하고 신이 났다. 연애 때고 시어머님 되실 분도 계셔서, 화도 못내고 다소곳하게
눈 내리 깔고 기다렸다. 시간은 흘러 밤 9시가 되었는데도 눈치 없는 친구들은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았고, 신랑은 신이 나서 이제는 다른 친구들까지 전화로
불러 모으고 있었다.
나의 참을성은 한계에 부딪혀,
"저... 나 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하고 이를 앙다물고 그 집을 나섰다. 집을 벗어나
횡단보도에 이르러 내가 입을 뗐다.
"우리 헤어져요. 도무지 자기란 사람은 안되겠어요. 지금 집에서 다들 우리 오기만
기다리시는데 해도 해도 너무하네요."
이렇게 해서 옥신각신 하다 감정에 복받친 나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고, 놀란
우리 신랑은 나를 붙잡고 건물 한쪽 구석으로 가서 싹싹 빌며,
"미안해, 지금이라도 인사드리러 갈께."
했지만 나는 헤어지자는 말만 거듭했다. 담배를 몇대 피우고 초초해진 이 남자, 갑자기
눈이 허옇게 뒤집히면서 뒷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이다. 순간
앞이 노래지면서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어머님께서 대한민국에서 둘도 없이
키웠다는 이 아들,이대로 가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굴렀다. 마구 흔드니,가늘게 눈을
뜨며 얕은 숨을 훅 내쉰다.
"괜찮아요?걸을 수 있겠어요?병원에 갈래요? 하니,괜찮다며 부축 좀 해달란다.그 큰
덩치를 부축을 해서 대문을 들어서는 걸 보고 돌아섰다. 그리고도 그 집을 한바퀴 빙
돌고 갔다. 혹시 무슨 일이 나나 싶어.
그렇게 해서 그날 사건은 헤어지는 건 고사하고 가슴을 쓸어 넘기며 넘어갔다.
그 뒤로 우리는 결혼을 하였고, 순조로운 결혼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부부싸움을 하다 너무 화가 난 내가 집을 나가려고 아파트 현관문을 돌리는 순간,
신랑이 갑자기 '윽'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그런데 그 순간 왠지 1년전 그 사건이
오버랩되면서 마음이 미심쩍었다.속으로 '저게 연기면 내가 문여는 순간 쫓아나올거고,
안따라 나오면 진짜 쓰러진 거겠지' 하며 현관문을 확 돌리는 순간 남편이 번개 같이
달려 나와 "어딜 간다고 이래, 제발 가지마" 하며 바짓가랭이를 붙드는 것이었다.
너무 기가 막혀
"혹시 작년 추석때도 ?" 하니,
"그럼 어떡해, 안그러면 헤어지게 생겼는 걸.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일단 붙들어야지" 하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픽 나왔다.
"방송관계자님, 연기력 대빵 뛰어난 우리 남편 캐스팅 해가실 생각 없나요? 무료로
데려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