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중2인 딸아이 수학여행 가방꾸려놓고서 설레는 눈길로
"엄만 수학여행 어디로 갔다왔어 ? "
대답을 기다리는 딸아이의 눈망울을 바라보다 엄만 수학여행을 가본적이 없어.
중2올라가 육성회비 못내서 퇴학한게 내가 다녀본 학교의 전부이니 얘기를 하다말고
못이메어 더잇지를 못하고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 걸 딸애에게 들킬가봐
얼른 고개를 천정으로 들었네요
주책스럽게도 한번 터진 눈물보는 겉잡을수 없을 만치 이상스레 그 시절 애처롭던
내 모습으로 돌아가 울먹이며 딸애에게 더듬더듬 중2에 올라와서 육성회비 못내서
중퇴하고 옆동네 과수원 밭메는 일을 보름동안 해서 그임금으로 밀가루 한포사서 동생들 수제비 해주라고 사놓고 돈벌러 떠났던 얘기까지 하다가 기어이 꺼이꺼이 울고 말았네요
잘이해를 할수없어 말똥거리는 딸애는 "그럼 그때 엄마 재산은 얼마나 됐어? "
우리 딸애는 지 재산으로 디카 시디피 지 혼자만의 재산 갖는것을 즐기는 아이...
내거라는 개념이 그때 아무것도 없었다는 걸 어떻게 설명이 안되더라구여 그 절대 빈곤을...
그시절은 그럼 다그렇게 가난 했냐고 하는데 다 그렇지는 안았지만 우리집은 가난했으니까
외할아버지가 가난한 공무원이 었는데다가 몸이 아파서 일찍 퇴직을 해야 했으니까
외할머니가 생계를 책임졌으니까 오죽 했겠니?
서울로 길떠나는 애앞에서 주책스럽게 내가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감정조절이 안되더라구요 아이는 그래도 다행히 밝은 모습으로 떠나고
남겨진 난 다른 식구들 깨지 않은 거실에서 개밥을 주면서도 계속 눈물이 흐르더라구여
거의 잊고 지냈던 내청소년 시절의 설움이 새삼스레 사무치네요
한참 꿈 많고 그래야 할 시절을 14세에서 19세까지 정말 제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절대적으로 빈곤했던 그시절에 제가 일한집에서 임금은 그대로 집으로 양식으로 주었었나 전 임금을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것 같네요
그 시절은 왜 그리 순진했는지
내가 일을 안하면 온 가족이 굶어죽을것 같은 환상속에서 오직 동생들 걱정...
조금의 용돈 만 생겨도 공부하는 동생들에게 사전 사보내고 그때의 사전이 그동생 지금 다 장성해 외국나가 있는데 도로 내게로 되돌아 와서 삐뚤빼뚤 써진 글씨 "1977 열심히 " 나혼자 그시절 기억하네여
한 인간으로 정체성이 확립되고 그래야 할 시절을 그렇게 소진한 댓가로
저의 20대는 참 힘들었더랬지요
스므살때 어린시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못읽은 동화책들을 닥치는대로 읽었으며 (다행히 어린아이 같은 감성을 가진편이랄까 ㅎㅎ)대화가 안되더라구여 넘 많이 비어있어서......
스므살즈음에 내 정체성에 눈뜨게 되면서 집으로의 일체의 송금을 끊었지요
자식들의 희생에 길들여진 아버지는 또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 찾아오셨더랬지여
전 일체 연락을 끊음으로 날 지킬수 있었지만 내심으로 죄책감은 참 많이 힘들었지요
정신과 치료를 3년간 받을 정도로 .....
공장에 다니면서 그시절 한달에 6만원을 받으면서 3만원 정도였던 검정고시학원을 등록해서 공부했지요 월세를 내면서 거의 끼니는 라면으로 때우면서 그래도 참 행복했지요
중학과정 고등과정을 거치면서 너무 부실한 먹거리에 건강을 해쳐서 일반 대학진학은 포기하고 통대과정을 공부하다 지금의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오는 바람에 졸업도 못하구....
바로 아이가 생김으로 학업도 이어지지 못하고 아이들이 좀크면서 다시 과를 바꿔서
좀 실용적인 학문으로 다시 시작을 했지만 검정고시로 벼락치기 공부한 내실력이
딸려서 따라가지 못하구 그것마져도 졸업을 못하구 사이버 대학 한학기 공부를 했지만
지금 경제 형편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더 복학도 못하고
사이버대학 학비도 쓸데없이 비싸기만 해서 설립취지가 무색하져...
참 많이 노력하구 그렇게 살은 것 같은데도 돌이켜보면 이룬것은 뭐 별로 없네여
다른이들은 다 기본적으로 가진것을 난 그걸 이루기 위해 그 황금기를 다 허비했다구
생각하면 참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 것으로 인해 참 소중한 만남을 가졌구 원숙해진 나를 보기도 하니까요..
한번 흐트러진 감정의 물꼬가 가라않질 않아서 이렇게 쓰고 보니 좀 진정 되는것 같네여
이글을 쓰면서 눈물이 소리없이 흐르네여........
아직도 치유되지 않는 내 유년의 기억의 편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