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중 열네시간을 나는 도마 앞에서 보낸다.
횟집의 음식은 종류가 많고 복잡해서, 여럿이 준비하는데,
스물 몇가지 음식 중, 회보다 앞에 나가는 죽, 해물파전, 돈까스, 튀김
회 뒤에 나가는 생선구이, 버섯철판, 장어구이, 돌솥밥, 그리고 탕을 준비하고, 만들어
내주는 일이 내 일이다.
그래서, 나의 하루는 칼질로 시작 된다.
파전에 들어갈 야채를 썰고, 고구마를 썰고,무와 미나리,대파, 고추를 썬다.
11시가 되면 도마 앞에는 고추, 마늘, 파, 가 든 통이 나란히 놓이고,
도마 아래에는 튀김용 고구마, 파전 반죽, 튀김 반죽, 무가 든 통이 나란히 놓인다.
등 뒤의 가스대 아래에는 돌솥밥을 하기 위해 미리 전복내장(게우)과 야채를 볶아 놓은 볶음밥 통이 있고, 전복죽 냄비가 놓인다.
도마의 오른편에 미나리와 대파 바구니가 놓여지고 나면,
도마는 행주질 되어 아침의 깨끗한 상태로 돌아간다.
11시 반, 점심 장사 준비가 대충 마무리 된것이다.
이른 손님이 없다면, 열두시까지 30분의 여유가 생긴다.
이 삼십분 동안 도마는 하얀 달력이 깔린 나의 책상이 된다.
얼마 전까지 양파, 고추, 당근 썰던 도마는
양파의 껍질을 벗겨내듯 내 의식의 껍질을 벗기고,
고구마 썩은 부위를 도려내듯,
쓸모 없는 생각들을 뭉텅뭉텅 잘라내는 지혜의 도마가 된다.
나의 도마는,
어떤 날은 조나단 리빙스턴이 날던 그 하늘이 되고,
어떤 날은 크낙새 우는 광릉숲길도 되고,
어떤 아침은 오쇼 라즈니쉬의 명상의 길이 되기도한다.
이 도마 위에서,
나는 많은 이들의 지혜로운 이야기를 만나고, 내 안의 나를 만난다.
첫번째'어서오세요' 소리에서, 마지막 점심 손님, '안녕히 가세요'까지
도마 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세시부터 네시 반 사이 다시 한번 도마는 변신을 한다.
다시, 달력이 깔리고,
책장을 서너장 걷는 사이 내 손은 턱 아래로 내려가고,
내 머리는 손 위로 떨어진다.
등 뒤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살에 스르르 눈이 감기고,
나는 이 도마 위에서 아무도 흉내 못 낼, 가장 달콤한 잠을 잔다.
도마 위에서 일하고,
도마 위에서 잠자고,
도마 위에서 책보고,
나의생활은 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다.
빨간 테이프로 손잡이가 감겨 있는 예리한 칼날을 옆에 두고.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 나지 않는다.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 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는 사소한 고민이다.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걱정의 4%는 우리가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오늘은 너무 바빠서
고도원의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책의 이 부분 밖에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쓸데 없는 걱정을 도마 위에서 잘라낼 수 있었으니,
진정 이 도마는 지혜의 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