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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꿈을 그려볼까요?


BY 선물 2004-03-20

어린 소녀의 꿈은 참 단순한 것이었다. 어른이 되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고작이었다. 크게 구속받은 적도 없었건만 소녀는 웬 일인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어른이 얼른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난 후의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았고 잠도 실컷 잘 수 있고 보고 싶은 만화책도 맘껏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텔레비전도 원하는 대로 볼 수 있고 성적표 따위로 마음 졸일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단순한 자유가 무에 그리 급했던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소녀에게는 시간 가는 것조차 더디게 느껴졌다. 소녀에게 있어 어른은 그만큼 행복한 존재로 비쳐졌다.

 열다섯 사춘기 소녀의 꿈은 소박한 것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참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평범한 꿈이었다.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아이들을 평등하게 사랑으로 가르치는 그런 좋은 선생님을 꿈꾸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꿈을 갖고 있었는데 그 꿈이란 것이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래!' 하는 조금은 막무가내인 것이었다. 엄마는 옷도 화려하게 입지 못하고 늘 고생만 하는 고단한 인생의 주인공으로만 소녀는 생각했다.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했던 철없는 소녀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스물 두 살 아가씨의 꿈은 사춘기 소녀의 꿈보다 오히려 더 동화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백마 탄 멋진 왕자님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설레는 그녀의 입술 위에 달콤한 키스를 해 줄 것만 같은, 그리고 그녀를 아름다운 성으로 데리고 가서 천년 만년 사랑을 쏟아 줄 것만 같은 그런 멋진 날이 꼭 오게 되리라 생각했다.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열려 있던 그 무렵, 그녀 앞에 펼쳐진 미래는 하얀 도화지와 같았고 그 위에 펼쳐질 그림은 그녀가 뜻하는 대로 그려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에게 미래는 황홀한 꿈으로 가득 차 있어 어떤 어두움의 그림자도 끼어 들 틈이 없어 보였다. 스물 두 살 아가씨의 눈빛은 그래서 언제나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다.

 이제 어린 소녀는 사춘기를 지나고 청년기를 지나서 불혹지년(不惑之年) 마흔이 되었다. 그러나 나이의 이름답지 않게 여전히 꿈으로부터 유혹을 받기도 한다. 다만, 예전처럼 미래에 대한 추상화를 욕심내지 않을 만큼은 성숙하여 이리저리 때없이 흔들리는 일은 줄어든 것 같다. 비록 어린 소녀가 꿈꾸었던 자유, 사춘기 소녀의 소박한 소망, 그리고 스물 두 살 아가씨의 찬란했던 꿈은 빛을 잃고 사그라졌지만 이 시각, 남겨진 그녀는 나름대로의 꿈을 지니며 산다. 그녀가 가진 꿈은 평범한 삶이다. 그나마 평범한 삶이 그녀가 원하는 평화로운 마음을 선물하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범함 정도는 큰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평범함이 어떤 것인지 따져본다면 그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녀는 미혼일 때 마주쳤던 한 젊은 부부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남편의 애정 어린 눈길을 감당치 못하고 간지럽다는 듯 애교 가득한 몸짓을 보였던 젊은 아내. 그녀의 저녁 노을 닮은 발그레한 두 볼을 두 눈에 담고 미래의 흰 도화지 위에 그리리라 마음먹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솜사탕 같은 달콤한 미래가 그래서 마음 급하기만 했다.
또한, 그림 속 아름다운 중년 여인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부드러운 숄을 걸치고 아늑한 소파에 깊숙이 들어앉아 창 밖으로 내리는 소담스런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과 긴 머리 우아하게 틀어 올린 단아한 옆모습, 그리고 넉넉한 미소를 미래라는 도화지 위에 그리리라 마음먹었다. 또 하나 그녀가 잊지 못하는 것은 수줍은 웃음 머금고 서로의 손을 깍지 낀 노부부의 부드러운 주름 골이다. 팽팽한 젊음의 그 어떤 얼굴도 웃음으로 자리잡은 노부부의 편안한 주름보다 더 황홀할 수 없게 느껴질 만큼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아름다운 그림. 그것도 그대로 그려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정도 그림쯤은 너무나 평범한 것이기에 굳이 꿈꾸지 않아도 누구나 손쉽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인 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마흔의 그녀는 그것조차 얼마나 소중한 꿈인 지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돌아보면 젊은 아내의 노을 닮은 수줍은 발간 볼도 언제나 그녀의 것일 수는 없었다. 그 만큼의 아픈 눈물도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고스란히 맡겨져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지금쯤 그녀가 갖고 있어야 할 중년의 정갈한 모습과도 제법 거리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제 그녀는 황홀한 노년의 편안한 주름 골을 갖는 것조차 간단치 않음을 아프게 인정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을 꿈으로 간직하며 놓치지 않기를 소망한다. 그것만큼은 꼭 이루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기에....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미래로 내딛는 걸음이며 설레는 호기심을 갖게 했던 미래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걸음은 생각보다 무겁고 상그런 인사를 건네던 그림들이 그녀의 몫이 아님을 확인하는 그 작업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삶은 그녀에게 욕심을 비우라는 가르침을 베풀어준다. 그녀도 그것을 신앙처럼 철썩 같이 믿고 따르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왜 평화는 늘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 가끔은 알 수 없는 욕심이 어디 몰래 숨어있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는 두렵기만 하다. 그동안 기본적인 의식주생활이 충족되는 삶, 그저 넘치지 않게만 누리며 큰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삶이 욕심 없는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함이란 것을 잘못 알고 있었다. 평범함의 진실은 얼마간의 가난이고 걱정이며 고단함이었다. 도대체 마음 한 자락 깔아 놓은 회색 빛 걱정 하나 갖지 않는 삶이 어디에 있기에 그것을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비로소 그녀는 그동안 가졌던 마음이 욕심일 수 있음을 아프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조절한다. 다행히도 그녀의 마음 속 평화조절기는 아직 품질이 좋은 편이라 그녀가 탐욕으로 펄펄 열이 끓어 병들기 전에 욕망지수를 안전하게 낮추어준다. 그 눈금이 가리키는 지수를 따라가 본다. 그 곳은 '조금 더'라는 것을 허용치 않는 세상이다. 배곯지 않고  헐벗지 않고 찬바람 피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갖는 것에서 '조금 더'를 외친다면 욕심이 되는 세상이다. 천성적으로 큰 욕심 없는 그녀에게도 조금은 빡빡하게 느껴져 잠시 멈칫거리게 만든다. 특히 자식에 관한 부분은 기본적인 것만으로 만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던가... 하지만, 자연을 닮은 그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운 지는 철이 덜 든 그녀의 눈에도 선명하게 들어온다.

 때로 그녀의 마음이 바람보다, 빛보다 더 빨리 자연 닮은 그 곳으로 앞서 달리게 될 때가 있다. 순수를 잃어 가는 아이들의 때묻기 시작한 눈빛을 볼 때나 거칠어져 가는 말투를 들을 때, 영악스럽게 숫자에 집착하는 것을 느끼게 될 때, 그리고 힘들여 노력해도 결실이 미약할 때 땀흘린 만큼 정직하게 답을 주는 흙내음 나는 그 곳으로 그녀의 마음은 내쳐 달린다. 그러나 달리는 것은 마음뿐이다. 인생이란 단 한 번뿐인데, 마음만 바꾸면 원하던 평화를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꾸 이런저런 변명으로 주저하게 되는 그녀는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어린 소녀와 사춘기 소녀, 그리고 스물 두 살 아가씨는 세월의 강물을 흘러흘러 지금의 그녀에게로 스며들었다. 두 팔 벌려 그들을 껴안은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들과 함께 또 다시 세월의 강을 헤엄쳐 저 어딘가에서 팔 벌려 기다리고 있을 한 여인의 품으로 스며들기 위해 쉼 없이 허우적거리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쉼 없이 달려가는 시간은 때로 강의 굽이굽이에서 자신의 일그러진 인생을 확인하게 해 주기도 하면서 어느 순간 인생의 끝자락에 그녀를 데려다 놓을 것이다. 그 때 완성된 그림을 보는 순간 아프게 등돌리는 일이 없으려면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매 시각 배우게 되는 그녀, 그 찰나의 순간 고운 미소지으며 자신의 그림을 보듬어 안기를 갈망하는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그녀인 내가 간절히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