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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의 기억(3).


BY 마야 2004-03-04

할머니.

 

세월은 과거를 회상하게 해 줍니다.

그기고, 그 과거가 한 개인의 역사가 되기까지

아주 많은 기억들이 얼기설기 엉켜서 마침내는

한타래의 실타래가 됩니다.

 

저에게도 세월따라 묻혀져간 할머니가 계십니다.

할머니와 제가 초등학교 시절까지 나누었던 기억들은

아직도 저의 가슴 한 켵에 고스란히 남아, 저의 기억속의

역사가 되어 있지요.

 

할머니는 아랫마을, 대 지주들이 전통적으로 지은 집들처럼,

넓다란, 대동의 논 한 중앙에 넓디덟은 기와 지붕을 떠받들고,

꽤 큰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집이 바로 할머니가 살았던 집 이었습니다.

나무 울타리는 뒷곁에, 좌측으로는 감나무가 즐비하고, 우측으로는

연못이 호수만하게 있었던, 아주 큰 저택이 바로 저의 할머니가 사셨던

집 이었습니다.

평생 자녀가 한 분도 없었던, 할머니는 아버지를 몹시 사랑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오빠가, 저의 할아버지 였으니까...할머니는 엄밀히 따지면, 고모할머니 였지요.

아버지가 어렸을때, 친 할머니를 여의셨고, 해서...고모할머니는 아주 자연스럽게 할머니로

자리메김질을 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저와 아버지를 가장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앞 산 동산에 올라, 아랫 마을을 내려다 보면, 하얀 깃발이

걸려 휘날립니다.

그것은, 할머니가 저를 부르는 신호 같은 것 이었지요.

그러면, 저는 작은 잰걸음을 더욱 서둘러, 할머니 댁으로 날아가듯이 내려

가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칠월 칠성 날이 되면, 늘 저를 아주 깨끗한 물로 목욕을 시킨다음,

쌀을 직접 저의 작은 손으로 씻게 하고, 다음은 그 쌀을 돌 절구에 곱게 찧어서,

체에 걸러, 쌀 가루를 만들고, 다시 그것을 떡 시루에 켵켵이 쌓아, 떡을 찌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저의 손끝에 의존하셨었죠.

"그렇지...우리 아가, 아주 잘 하는구나...부처님의 힘을 빌어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이 할미는 알았단다...그렇지!. 그렇지!. 이 떡은 속세의 어떤 누구의 더러운

 손떼가 묻지않은 아주 정갈한 떡이 될꺼야...암!."

그렇게 만들어진 떡시루를 할머니는 다음 날, 직접 머리에 또아래를 받혀 이고, 절로

떠나십니다.

절에 할머니 치마자락을 잡고 따라 갈 동안, 할머니는 불국사가 지어진 이야기, 전설을

제게 들려주십니다.

" 대성이는 명주 아씨 집의 소머거리 총각이었단다.

  인물이 어찌나, 충출했던지...어디 감히 말이 될법이나 했겠니?

  주인댁 명주 아씨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천민인 대성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 명주 아씨는 목을 메어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구나..."

그렇게 할머니의 이야기가 끝이 나기도 전에, 우리는 절에 도착하곤 했지요.

 

할머니와 절에서 며칠을 보내고, 내려오면 할머니는 저의 손에

100원을 쥐여 주시고, 조기 꾸러미, 김, 그리고 흰 쌀을 잘 싸서, 저의

머리에 얹어 주시면서.

"조기는 우리 아가랑, 애비가 먹고, 이 돈은 우리 애기가 좋아하는 공책도

 사고, 연필도 사고, 오다마도 사 먹고...알겠지?"

그러면, 저는 베시시 웃고, 그 무거운 작은 대야를 잘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지요.

 

할머니는 속세의 손떼묻지 않은 떡으로 불공들이기를 즐겨 하셨고.

저 또한 할머니의 말을 빌리면, 할머니의 불공이 있은 후,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손자를 더욱 귀하게 여길때도,

할머니는 저를 각별히 예뻐 하셨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대신, 저는 아버지의 사랑과 할머니의 사랑을

톡톡히 받으며 자랐지요.

 

할머니가 주신, 100원은 지금의 돈에 비하면, 얼마나 컸던지.

10원어치 과자를 사면, 오다마-눈깔사탕-가 3개, 줄뽑기가10개,

라면땅이 한 봉지.

그렇게나 많은 과자를 살 수 있었으니까요...

저는 그 100원을 저의 이불 아래에 몰래 숨겨두고,

동생들이 말을 잘 들으면, 오원씩 꺼내다가, 맛있는 과자를 사서

나눠주기도 하고, 색연필 한 자루도 사고, 종이 인형도 한 장 샀었지요.

그래도, 그 100원은 꽤 오랫동안 저의 이불 아래에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제시대를 사셨던, 할머니는 그래도 소학교 교육을 받으셨던 이유로,

글을 쓰고, 책을 읽는것을 즐길 수 있었지요.

할머니 댁에서 먹던 홍시며, 곶감이며...

그리고, 그 왕방울 만한-입에서 잘 녹지 않아서 오리를 간다고 해서 붙여진- 오다마

알사탕이 바로 세월 자락을 잡고, 밀려오는 과거의 회상의 실타래 속에 묻혀 있습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 제가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뵈었던 것은,

할머니가 팔순을 넘긴 뒤, 학창시절 우연히 광주에 내겨 갈 일이 있어서, 잠깐 집에

들렀을 때, 할머니의 손톱을 깎아드리고, 빗질을 곱게 해서, 할머니의 쪽머리에 비녀를

꽂아드린 후, 얼마 안되서 꿈을 꾸었지요.

그리고, 전화를 허겁지겁 집으로 했을 때, 아버지는 할머니가 임종을 하시려는지

저를 부른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수화기에 대고.

"할머니, 조심해서 먼길 잘 가셔요. 저...할머니 아가..."

하고 목이 메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곱게 여든 셋의 연세를 접으시고,

길을 떠나셨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회상을 더듬어야만, 저의 기억의 실타래에 묻어나는 할머니가

되어 버렸군요.

요즘도 가끔, 꿈을 꿈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날듯이 곁에 오셔셔,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나신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