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려나, 마음이 살랑살랑 가볍게 흔들린다. 꽃보다도 바람보다도 내 마음이 먼저 봄을 맞은 듯 정신 없이 떠다닌다. 봄은 매서운 찬바람 끝자락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기별도 없이 어느 사이에 냉큼 고개를 내민다. 새초롬한 눈빛은 여전히 쌀쌀하기만 한데 입고 온 옷 빛깔은 더없이 화사하다. 그 봄빛에 어수룩한 내 마음만 공연히 간지럼을 탔나 보다.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지만 원래 나는 봄을 좋아했던 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봄을 얄미워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봄 햇살은 따갑게만 느껴졌고 봄바람은 살랑거리는 여인네 궁둥이 같아 괜스레 곱지 않은 눈초리로 흘겨보곤 했다. 그래서일까, 꽃가루 날리는 본격적인 봄이 되면 내 피부는 늘 한 차례 가려움증으로 몸살을 앓는다. 내가 저를 시샘하는지 저가 나를 시샘하는지 우리는 서로 팽 토라져 도통 손 내밀 마음 없이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꽃의 도시 일산으로 이사오면서부터 봄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곳곳에 펼쳐져 있는 넓은 공원길마다 색색이 아름다운 꽃이 어우러져 근사한 화단을 만들었고 여러 채도의 초록은 봄이 아니고선 도무지 이루어낼 수 없는 찬란한 빛을 연신 발해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자연 그대로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곳곳에 널려 있어 눈과 코를 한껏 호사시켜준다. 그동안 내가 보아 온 봄 경치래야 고작 길거리에 획일적으로 설치된 화단정도였으니 인공감미료 같은 그 맛이 어찌 깊고 진한 봄의 참 맛을 내게 선물해 줄 수 있었을까... '마음이 거기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르는 법이다.'라는 말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피어나는 아름다움이었을진대 마음 담지 않은 내 눈길이 봄을 그렇게 무 덤덤하게 바라보게 했나 보았다.
그런 봄이 창 밖에서 아른거리며 찬란한 봄빛 가루를 온 집안에 흩뿌려놓는다. 다들 저를 찬미하려니 생각하고 우쭐거리는 기색이 역력해 보이지만 이젠 그 높은 콧대가 마냥 밉지만은 않다. 차가운 겨울을 인내하고 힘겹게 찾아온 생명의 계절이기에 오히려 그만큼 인정해주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난다. 그렇게 한 번 마음을 주게 되니 그 동안 성가시게 생각했던 따가운 봄볕조차 열린 마음으로 보듬어 안고싶어진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로써, 노래로써, 그림으로써 아름다운 봄을 찬미하지만 실제로 봄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봄 햇살에는 관대하질 못한 것 같다. 어쩌면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봄과 산모는 닮아 보인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양분을 태아에게 공급하면서 거칠어진 산모의 얼굴빛은 잔뜩 예민해진 봄날의 낯빛과 닮아 보이고 새끼 밴 동물들의 보호본능으로 한껏 사나워진 포효는 봄날의 초입에서 맞닥뜨릴 차가운 꽃샘바람과 닮아 보인다. 어찌 아무런 산고(産苦) 없이 그저 생명을 얻을 것인가? 한 생명의 탄생을 위해 수반되는 어머니의 고통이 차라리 위대해 보이듯, 까칠하지만 훌륭한 봄의 손길을 고통 중의 아내를 도와주는 남편의 손길처럼 우리도 그렇게 꼬옥 잡아주어야 할 일이다.
또한, 머잖아 봄이 화사한 본색을 완연히 드러내는 때가 되면 엄마의 젖줄처럼 땅은 지천으로 흐드러진 꽃과 갖가지 봄나물들을 선사하는 큰 은혜를 베풀 것이다. 둔덕에서 엉덩이 약간 치켜올린 채 나물 뜯는 아낙들의 손놀림도 바빠질 것이고 꽃을 배경으로 고운 추억 사진에 담고파 하는 꽃 닮은 청춘들도 꽤 눈에 익은 그림이 되리라.
축 가라앉아 있던 마음을 일으켜 세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도 봄은 선물해줄 것이다. 학교 교정의 얼었던 땅도 봄기운에 스르르 몸을 풀게 되고 그 위로는 갓 입학식을 마친 햇병아리 같은 신입생들의 나부대는 종종걸음도장이 가득 찍힐 것이다. 갖가지 나물들은 껄끄러워진 입맛을 불을 댕기듯 돋구어줄 테고 내리쬐는 햇살에 꼬박거리며 잠을 쪼아댈 춘곤증도 거뜬히 이겨낼 기운을 불어넣어 줄 테니 싱싱하고 넉넉한 봄의 마음씀이 참으로 곱고 따스하기만 하다.
아마도 그 따스함이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기지개 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는 힘의 근본이리라. 인생이란 기쁨보다는 슬픔, 즐거움보다는 고통에 속한 시간이 대부분인 여행길과 같아 우리가 하염없이 내딛는 발걸음은 늘 고단해 보인다. 그대로 앞만 보고 걷다가는 비틀거리며 주저앉게 될 것만 같다. 사람들은 대개 기쁨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즐기려는 경향이 있지만 슬픔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것이기에 할 수만 있다면 그 어두운 얼굴을 피하고싶어하고 도망치고싶어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어차피 기쁨보다는 슬픔과 맞닥뜨릴 일이 많은 법, 결국은 채 몇 발자국 옮기지도 못한 채 다시 그 얼굴과 마주 대하게 된다. 늘 그렇게 고단한 발걸음을 이끌고 가야 하면서도 우리가 마냥 주저앉지 않고 또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수 있는 힘은 바로 희망이라는 씨앗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힘들고 혹독한 시련 속에 있으나 굳게 마음먹고 참고 인내한다면 언젠가는 으슬으슬 거리는 한기로부터, 내내 품고 있던 겨울의 그 우울한 어두움으로부터 벗어나 인생을 찬란하게 꽃피울 날이 기어이 오고 말리라는 희망을 애써 봄에게서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인생의 봄은 희망이라는 한 알의 씨앗만으로 그저 꽃을 피우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흘리는 값진 땀방울 위로 따뜻한 햇살과 촉촉이 대지를 젖게 하는 봄비를 달게 뿌려 주리라는 기대가 있기에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헤쳐 나갈 힘을 얻게 된다. 지금 웅크리고 앉아있는 지치고 고단한 영혼들이 있다면 두 팔 벌려 가슴 펴고 봄의 기운을 흠뻑 받아들여 볼 일이다. 또한, 성가신 햇살에 더 이상 이맛살 찌푸리며 있지 말고 인내 뒤에 맺게 될 꽃봉오리의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한 번 더 힘 써 볼 일이다. 그래야만 또 다시 넘어지더라도 고통을 딛고 분연히 일어설 지혜를 갖게 될 것이다.
희망인 봄은 그래서 찬미 받아 마땅한 계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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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에 올려 놓은 인생의 봄날을 수정해서 이 곳에 다시 올립니다. 한 분 쓴 글을 다시 수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번에 혹독하게 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