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엔 '할망탕'이라는 목욕탕이 있다.
목욕탕 이름이 있기는 하겠지만, 근 십년을 다녔어도 그건 알 수 없고,
다만 백살난 할머니와 딸(아마도 육십은 멈었지 싶다.)이 운영하고 있어 그렇게 불리운다.
목욕탕에 들어서면, 할머니가 어김없이 앉아 느릿느릿 셈을 하지만, 틀리는 일이 없다.
합판으로 만든 계산대 옆 할머니와 함께 늙어가는 늘어진 커튼을 열고 ,
꼬깃한 천원짜리 지폐를 내밀면, 달그락 달그락 100원 짜리 동전 두개를 건네 준다.
시설 좋은 해수탕까지 마을에 들어섰지만, 똑 같은 가격을 치르면서도 이 탕을 찾는 이유는,
계산대와 마주하고 있는 낡은 신발장에 바로 지금처럼 잘해야 한 두개의 신발밖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두개의 신발 옆에 내 신발을 놓고, 들어서니, 이미 낡아 까실해진 흰 수건 한장과 노란 수건 한장을 할머니가 건네 준다.
청결함을 논하자면, 그리 탐탁할리는 없지만, 할머니처럼 낡은 이 수건도 좋다.
탕 안으로 들어서니, 두 사람이 먼저 와 있다.
가볍게 목례하고, 대야 하나에 초록 색 방석 하나를 들고 자리를 잡는다.
이 목욕탕은 우습게도 남탕과 여탕이 천정이 트여있는데,
남자의 기침 소리나 '어 좋다'하는 할아버지 소리도 들려오기도 하며,
부부가 앉아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다.
"등 좀 밀어 줄래?"
이태리 타올을 내밀며 오는 할머니 한 분...
혹 아플까봐 조심하며 등의 구석구석을 밀어드리니, 나보고도 돌아 앉으란다.
아무 생각 없이 내 등을 맡기고, 앉았다.
그래, 거기.
아무리 손을 위 아래로 뻗어봐도 닿지 않은 딱 한뼘이 있어 늘 불편했다.
등밀이 기계의 원판 위에 아무리 비벼대도 시원치 않은 그 곳을 할머니 손이 지나고 나자,
시원하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 몸 곳곳에 내려 앉은 때를 씻어내고, 뜨거운 탕에 들어가 눕는다.
몸 에 차오는 뜨거운 기운...
인간이 그렇게 진화를 거듭해 왔어도,
자기 등을 자기가 밀수 없고,
자기 등의 가려움을 자기 손으로 긁을 수 없다.
우리가 지고 사는 등 위의 한뼘은 결국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몫이다.
그게 부부일 수도 있고, 이렇듯 이웃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고,
전혀 무관한 때밀이 아줌마일 수도 있고, 때밀이 기계일 수도 있지만,
그 무엇이었든 간에, 그 누구였든 간에 내 문제를 가지고 도움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유다.
만약, 남의 도움이 싫고, 남을 도와 줄 의사가 없다면,
등 위의 한뼘은 늘 가려워 지는 것이다.
이 할머니와 같은 사람들은 서로 등 밀어 주는 일이 예사롭다.
서로 돕고 함께 나누는 일이 배어 있는 세대다.
그러나, 난 남에게 신세지는 일을 싫어하며, 남을 도와 주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은
자기 중심적 세대다.
발가벗고, 등밀어 주는 일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
이 할머니의 손바닥이 내 등에 닿듯, 그 의식에 닿아보려 애써본다.
내 등이 가려울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라.
다른 이의 등이 가려울 때, 시원하게 긁어주어라.
이것이 손 끝이 등에 닿지 않는 이유인 모양이다.
탕 안에 김이 피어 오르는 물처럼,
내 안에도 뜨거운 김이 차오른다.
수증기로 뿌예진 유리 사이로 백살 할머니가 슬리퍼를 끌며 지나간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난 할망탕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