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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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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날의 슬픈 추억


BY 미금호 2004-02-05

그러니까 40여년 전 
우리가족은 강원도의 깊은 산골 탄광촌에 살았었다
아버진 탄광에서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남의 집일이나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서 살았었다
그것도 식구는 왜 그렇게 많은지....
우리식구는 그 당시 딸 이 다섯이었고 그 이후로도 셋을 합하여 
여덟이 되었다
그러니 밥도 먹는 날 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탄광에서 일하시다 갱이 
무너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치셨고 우리 집 의 생활고는 
이루 말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몇 달 동안 꼼짝도 못하시고 자리에 누워만 계셨다
먹을 것이 없던 그때 심지어 노색가루(지금의 가축사료)를 배급받아다 
멀건 풀 대 죽을 쑤어먹으면서 연명해야했다
그렇게 기----인 겨울이 지날 무렵 
저--멀리 새봄을 부르는 정월 대보름날이 돌아왔다
여느 집 들 의 굴뚝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오곡 밥과 나물을 짓느라 분주하건만 ...
우리 집  은 아버지의 허리 아파 신음하는 소리와 
어린아이들의  배고파 칭얼대는 소리와 어머니의 땅속으로 
젖어드는 한숨 속에 빈 가마솥엔 맹물만 끓을 뿐이다
하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자생력이 생긴다 했던가...
보름달이 산등성이에 두둥실 떠오르면 
큰언니 작은언니 나 동생은 커다란 양재기와 바구니를 들고
엄마 쉐타며 아버지의 야전 쟘바를 켜켜히 입고서 
동네에 밥 얻으려 나선다
다른 아이들은 보름달을 보며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
군인이 되게 해달라. 기타 등등 빌 때 
우린 배곯지 않게 해달라며 빌었다
또 다른 아이들은 보름날 성이 다른 아홉 집의 오곡밥을 
얻어먹어야 건강하다하여 재미 삼아 남자아이들은 저네 엄마 한복
입고 여장을 하고 신바람 나서 다녔다
하지만 우리자매들은 각자 흩어져서 생존 전략으로 오곡밥밥 을 얻으러다녔다
그야말로 어른들은 우리에게 밥을 주면서 다 알았으리라...
우리자매들의 눈빛은 장난기보다는 처절했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아주머니들은 우리에게 오곡밥과 나물을 듬뿍 듬뿍 주었다
왜냐면 다른 아이들은 대문을 당당하게 두둘겼고 
"오곡밥 좀 주세요!!!"를 목청껏 노래하듯 외쳤지만 
우리는 대문도 조심스레 열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커다란 양재기를 들이밀었으니까......
그렇게 웃마을 아랫마을 건너마을 돌아서 나오니 양재기와 바구니에는 
오곡밥과 나물이 가득가득이다
우린 서로 보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행복해하며 웃었다
그리고 휘영천 밝은 달빛에 반사된 눈길을 밟으며
밤골을 지나 기차굴을 넘어 오곡밥을 머리에 이고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와 엄마와 어린 동생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해 보름날 얻은 오곡밥으로 우리식구는 며칠동안은 
밥걱정 안하고 지낼수 있었다
그 후 우리 딸들 모두 건강하게 잘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월 대보름날 
특히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아홉 집을 돌아다니며 
얻어먹어야 1년 내내 잔병 없이 지낸다는 것과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것을 빌미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배려하며 나눠먹는 
아름다운 풍습을 퍼트린 
조상 님들의 지혜와 참뜻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해마다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하며 
새벽에 일어나 부럼을 깨고  귀 밝기 술을 따라주며
아이들에게 "내 더위 사가라"며  더위를  팔아먹으면서 
내 어릴 적 오곡밥을 얻으러 다니던 
아릿한 향수에 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