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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오르는 할아버지들


BY 남풍 2004-01-19

 아침부터 추적 거리며 내리는 비탓인지, 아니면 설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일요일치고는 비교적 한산한 날이다.

 두시가 넘은 시간이라 점심 손님도 뜸해져서,

따뜻한 바닥에 누워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세계의 명수필 50선'이란 책을 펴놓고,

세계의 대수필가들의 작품이라 '이래서 우리가 쓰는 잡문과는 다르구나'하며 읽다,

설핏 잠이 들었나보다.

어서오세요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니, 등산복 차림의 할아버지 서넛이 들어온다.

방어 있냐며 수죽관을 향하는 할아버지 뒤로 일행 역시 등산복을 입고 있다.

 

 열한명의 할아버지들은 방어회 를 주문해 놓고, 떠들썩하다.

간혹 술잔이 오가고, 건배소리와 유쾌한 웃음소리,

겨울비 내려 어둑한 일요일 오후가 환해진다.

 

 두시간 정도의 시간동안 쉴새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

오늘 등산 이야기와 젊은 시절이야기, 손주들의 이야기도 간혹 오갔으리라.

 

"여기 차 좀 주세요."

체크 무늬 머플러를 한 할아버지가 차를 청하더니,

곧, 등산화를 챙겨 신고 나온다.

 

아주 맛있게 먹었다며,  인사를 하기 위해 서 있는 직원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는'

할아버지의 눈썹이 무성하게 세어 있다.

유난히 풍채가 좋은 할아버지의 손에는 산자락 어디에선가 자라던 나무를 잘라 만든 듯한

지팡이가 들려있다.

 

"우린 매달 세째 주 일요일엔 비가오나 눈이 오나 산에 가요." 하며

산에 갔다오시냐는 질문에 자랑스레 대답한다.

이 할아버지들은 아마 오름 등반 모임인 모양이다.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제주에 364개의 오름이 있다한다.

 

 '오름'은 기생화산을 말하는데,

한라산이 화산이 폭발할 때 튕겨져 나와 만들어진 낮은 산으로,

제주의 어디를 가나 얕으막한 오름들이 있다.

'산'이라는 말이 거대하게 서있음을 연상한다면,

'오름'은 쉽게 올라갈 수 있어서 '오름'이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니, 이 비 날씨에 노인네들이 부담없이 오전 시간에 오를 수 있었겠지.

 

 나는 한없이 할아버지들이 부러워 진다.

한달에 한 번 부드러운 야생의 잔디로 둘러싸인 흙을 밟고, 함께 늙어 가는 벗들과

쉬엄쉬엄, 그리 숨가쁘지 않을 만큼 걸어 오름 꼭대기에 오르고,

돌아 오는 길에 핀 구절초무더기도 보고, 

겨울 땅 속에서 꿈틀대며 봄 기다리는 쑥의 여린 숨결도 느꼈을 것이다.

 

 삶을 '오름등반'으로 보면 이 할아버지들은  돌아 내려 오는 길일 것이며,

나는 숨차게 산의 중턱을 오르고 있는 중이다.

산을 오를 때는 꼭대기를 보지, 아래를 내려다 볼 여유가 없다.

하여, 등반을 마치고 돌아 오는 사람의 기쁨으로 충만한 얼굴이 부러워 지는 것이다.

나도 저런 얼굴로 나의 산을 올라 여유롭게 걸어 올 수 있을까하고.

 

역사에 남는 큰 업적을 이뤄 거대한 산이 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소수이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다수는 작은 '오름'일 것이다.

 

높은 산은 큰 나무를 품고 살고, 작은 오름은 낮은 나무를 안고 산다.

그러나 깊은 숲 우거지지 못해도, 작은 오름 등성이에 할아버지들 느린 걸음 등산하고,

 걸음 소리에 놀란 메뚜기 억새 뒤로 숨어 드는 그런 오름도 괜찮은게 아닐까하고

또오마며 나가는 할아버지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늙으막에 저런 얼굴로 웃을 수 있다면,

내가 오르는 이 산이 얕으막한 오름이어도 좋지 않을까한다.

 

이반 투루게네프,프랜시스 베이컨,나가이 다카시...그런 명문장가의 글을 읽으며 주눅들었던 나는, 그들의  산같은 글에 비해, 내 글은 오름이거니하며, 비 내리는 창을 본다.

 

물결 여울지는 바다에 빗방울 섞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