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읍의 서쪽 끝자락에는 국화저수지가 있고, 국화저수지를 끼고 4번
군도를 따라 올라 가다 보면 고종의 홍릉이 안치되어 있는 곳을 알리는
작은 철재로 만든 표지판이 보인다.
어느날 4번 군도의 꼭대기인 고비고개를 오르려 길을 나섰다가
발견하게된 표지판을 보며 내심 역사의 한자락을 발로 만날 수
있다는 설레임을 안고 표지판이 안내하는 우측으로 난 오솔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옛날 그 분이 이생의 마지막 길을 옮겼을 이 좁은 길위로 수북히
낙엽이 쌓여 있다. 쌓인 낙엽위로 시든 잎들은 무시로 떨어지며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난 낙엽이 떨어지며 만들어 낸 시간의 켜를
들춰 800년 전 옛날 이 땅을 다스리던 옛적 임금이셨던 고종을 만나기
위해 고려산을 올랐다
고려산 중턱 (국화리 180번지) 에 자리잡은 묘소는 권력을 상징하는
왕의 묘인 투탕카맨의 묘소나 천마총과는 아주 대조를 이루었다. 낮은
분봉, 초라하기 조차한 그 무덤을 보며 여느집 평범한 지아비의 무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묘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은 그것이
아님을 설명을 해주었다.
고종은 고려 23대왕으로 1213년부터 1259년까지 46년간의 재위기간을
가졌다. 최충헌에 이어 최우의 무신정권의 독재체제로 실권을 잡지
못하며, 잦은 민란과 외침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야 했다. 몽고의
침입으로 1232년 강도(강화)로 천도하여 28년간 항쟁하였고 생을
이 곳에서 마감했다. 국가의 존립이 흔들리던 시기에 불력에 의한
몽골을 격퇴하고자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고, 온갖 굴욕과 수모를
겪어가면서도 내외적으로 부는 바람에 잘 대처하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안내문은 전했다.
그의 무덤은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이 처했던 시대와 상황을 말해
주는 듯 하다.
그는 무덤속에서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걸까?
그의 아들인 원종은 개경으로 천도를 한 후에 그를 잊은 걸까? 아닐
것이다. 원종, 충렬왕, ..., 공민왕, 다음 대를 이은 우왕, 창왕 그들은 아마 그를
잊지 못했을 것이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외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추스리기에도 어려웠을 후손들은 외딴 골짜기에 작은 지붕을
얹고 누워있는 선왕을 두고 두고 마음으로만 아파했을 것이다.
그 후 왕조가 바뀌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흘러가는 시간속에 나는 그
시대를 희미하게 기억하거나 잊어 가고 있지만 오늘 여기서 난 그 시절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역사 속의 임금은 내게 많은 걸 일러 주었다.
국가나 개인이나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 - 군왕이 군왕으로서 힘이 없어
무신들의 칼날 앞에 몸을 움추려야 했던 명분상의 왕이 겪은 수모와 두려움,
거란, 몽고의 침입으로 늘 마음을 졸여야 했고, 결국은 도읍지를 옮겨야
했고 자식을 몽고에 볼모로 보내야 했던 아픔, 잘 알려지지 않은 산골짝
에서 신하의 무덤보다 작은 묘소에 누워야 했던 푸대접, 그것도 모자라
수백년이 지난 지금, 죽어서도 영혼은 외세에 휘둘리는 후손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아픔을 지닌 듯 하다. 그의 묘소가 있는 고려산 정상엔 미군 레이더
기지가 영공을 침투하는 적(북한)의 동태를 감지할 목적으로 서 있다.
80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 시절로 되돌아
가 있는 느낌이어서 마음은 생마늘을 집어 넣은 위장속처럼 아려 왔다.
그 아린 가슴 새로 찬바람이 분다. 찬바람에 밀려 늦가을 해는 서산으로
저벅저벅 큰 걸음을 옮기며 어느새 그의 분봉 위로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난 서둘러 오솔길을 걸어서 그 곳을 내려 왔다. 다 내려와 돌아 본 그 곳엔
무덤은 아니 보이고 미군 레이다기지에서 흘러 나오는 불빛 만이 깜빡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