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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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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추억


BY 옛 이야기 2003-12-22

 

어렸을때 동짓날이  되면 엄마는 아침부터 속 고쟁이에서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바빴다.

미리 나뭇단도 넉넉하게 아궁이 앞에다 쌓아 놓고, 먼저 솥에다 팥 을 넣어 푹 삶았다.

우리집은 마을 한 가운데 있었는데

제법 농사 마지기나 짓는 이웃집들에 둘러 쌓인 모습이었다.

 

옆집도 사는게 그리 어렵지가 않았고, 뒷집은 꽤 부자 소리를 듣고 살았다.

그리고 아랫집 귀자네도 무슨 날 이되면 언제나 넓직한 부엌에서는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 스러웠다.

 

귀자는 막내 딸 이었는데 위로 오빠와 언니들이 여럿 이어서 무슨 날 이 되면 올케 언니들이

와서 일 을 하였다. 귀자는 집안의 귀염둥이여서 올케 언니들이 애기씨라고

불렀다. 우리집 부엌에서 엄마가 음식을 만들면 귀자네 부엌에서도 며느리들이

음식을 만들며 수다를 떠느라 그 말 들 이 담 을 넘어 우리집까지 들려왔다.

 

"애기씨 이거 먹어 보이소 우리 애기씨 입 에 맞아야 할낀데..."

입 맛 이 까다로운 귀자에게 잘 보일려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던 둘째 올케는

얼굴도 아주 뛰어난 미인 이었다. 언제나 화장을 곱게 하고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대하던 모습이 인상적 이었다.

엄마는 아궁이에 불 을 지피며 부러운듯 혼잣말처럼 중얼 거리곤 하였다.

 

"저 집은 사람 사는집 같이 사네 농사 넉넉 하겄다. 이쁜 며느리가 둘이나 있겄다.

술 먹고 속 썪이는 서방이 있나 귀자 엄마는 복도 많타!!"

엄마는 부지깽이로 아궁이속을 휘저으며 넋두리를 하다가 얼른 치마 꼬리를 돌려

잡고 코 를 팽 풀고나서야 다시 할 일 을 하였다.

엄마는 눈 썰미가 좋아서 뭘 하나 하더라도 똑 부러지게 했다.

늘 불만이 솜씨는 좋은데 형편이 안 되어서 맘껏 발휘를 못하는 거였다.

 

엄마가 솜씨를 제대로 써 먹을수 있는 날 은 설 명절때나, 추석, 정월 대보름 날 그리고

동지 팥죽날 이었다. 오랫만에 큰 솥에다 붉은 팥죽을 가득 끓인 엄마는

팥죽을 담아서 먼저 집안 여기 저기에다 뿌렸다.

그리고는 이웃집에 나누었는데 집집마다 주고 받느라 빈 그릇으로 오는 적이 없었다.

어떤 집은 너무 되직하게 해서 숟가락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서로 솜씨를 평가 해가며  먹느라 배가 불러도 즐겁기만 하였던 동짓날 풍경들.....

몇날 몇일 동안 시원한 동치미 국물과 먹어대던 팥죽 맛 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구나...

추운 겨울 밤 이불 하나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 호롱불 켜놓고 엄마는 떨어진

내복 꿰매느라 연신 무딘  바늘을 머리에 쓱쓱 문지르고, 우리는 아랫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벽에다 손가락으로 그림자 놀이를 하며 놀았다.

 

엄마는 호롱불 심지가 닳아서 그을름이 길게 생기면 손으로 호롱 뚜껑을 열고

심지를 밀어 올렸다. 깜깜한 밖에는 매서운 바람이 귀신 울음소리를 내며 휭휭

지나 갔지만 새로 발라서 깨끗한 방문은 그 센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우리들을 지켜 주었다. 다만 행여 틈새로 바람이 들새라 덧바른 문풍지가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추위에 떨었지만  방 안은 너무나 따뜻하고 아늑하였다.

 

바느질을 다 하고 난 엄마는 우리가 보채지 않아도 알아서 밖으로 나가 밤참을

가지고 왔다. 아....늦은 밤 엄마가 가져온 김장 김치를 손으로 쭈욱 찢어서

밥 숟가락에 얹어서 먹던 맛 이라니....특히 내가 좋아 했던건 무우 김치였다.

배추 김치 사이 사이에 넣어둔 잘 익은 큼지막한 무우를 젓가락으로

쿡 찔러서 아삭 아삭 베어 물면 치아가 안 좋았던 아버지가 옆에서 입 맛을

쩝쩝 다시며 "거 참 맛있게도 먹는다." 하시며 부러워 하셨다.

 

이제는 초가집도 없고 부러워 하시던 아버지도 안 계시고 이제는 나도 이 가

시원찮아서 무우 김치를 자신 있게 베어 물지를 못하는 나이가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