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의 일이었다. 둘째 아이가 자꾸만 버릇없이 행동해서 나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옆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믿거니 하고 더 그렇게 행동하는 것 같았다. 괘씸하지만 차마 어른들 계신 앞에서 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살살 구슬려 일단 방으로 데리고 들어 갔다.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 들어 온 둘째 아이는 날카롭게 변한 내 눈빛을 보고서야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네 잘못은 네가 알고 있겠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간파한 눈치 빠른 아이는 냉큼 뒷모습을 보이면서 도망가는 것이었다. 아마 그렇게 도망가지만 않았어도 그 사랑스런 아이를 그렇게까지 심하게 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을 무시하는 아이의 뒷모습은 나를 바짝 약 오르게 하였으니 순간적으로 웃통을 벗고 있던 아홉 살 둘째의 등 짝을 손바닥으로 있는 힘껏 내리치게 만들고 말았다. `짝' 하는 마찰음이 어찌나 크게 났던지 아이도, 나도 그만 그 소리에 놀라고 말 지경이었다. 그 때부터 둘째는 있는 대로 소리지르며 우는 것이었다. 만약 이 아이가 울며 밖으로 나가게 되면 분명히 벌겋게 부어 오르기 시작한 연한 살을 시 어른들께서 보시고 며느리에 대해 큰 원망을 하실 것이 틀림없는지라 급한 대로 우선 아이의 입부터 틀어 막았다. 그리고 아이를 일단 침대에 눕힌 뒤 온 정성을 다해 발개진 등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또한 생각보다 심하게 맞았다는 억울함도 함께 어루만져 주어야 완전범죄가 될 것 같아서 아이에게, 때린 것에 대한 엄마의 마음이 매우 아프다는 것을 감동적인 말솜씨로 주입시켰다. 마음 약한 아이는 금세 눈물을 보이며 자신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감동적인 모습을 연출해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떤 엄마가 아이를 때린 뒤 아이의 아픔보다 시부모님께 혼날 것을 더 신경 쓰며 두려워할까를 생각하니 스스로가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정말로 내가 두려워 했던 것은 시부모님의 나무람 그 자체가 아닌, 나무람을 듣게 됨으로써 갖게 될 서운함과 속상함같은 원망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아이 등의 부어 오른 살이 대강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가자 가슴 조이시며 기다리시던 시 어른들께서는 대뜸 아이 등을 보시고는
"에고고... 얼마나 맞은 거니? 아니, 이게 뭐야. 세상에 아이를 때리려면 엉덩이나 한 대 때리고 말 것이지, 약한 등을 때리면 어쩌누... 사람이 하루에도 살이 여러 번 오른다는데..." 하시며 나를 나무라셨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텔레비전에만 시선을 두며 딴청을 피우고 있던 나는
"실은 잘못 맞은 거예요. 저 놈이 도망만 안 쳤어도 제가 그렇게까진 안 때렸을 텐데... 그리고 원래 아이들 살은 연해서 조금만 때려도 쉽게 부어 올라요." 라며 변명을 길게 늘어놓았다.
나는 더듬더듬 변명하는 내 모습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아이도 쩔쩔매는 엄마가 안돼 보였는지 별로 아프지 않았다는 말로 엄마를 돕고 싶어했다. 아마 마사지하기 전의 등을 보셨더라면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으로 며느리를 도깨비 보듯 하셨을 것이다.
가끔 이렇게 아이들을 혼내는 일로 시부모님과 갈등이 있곤 한다. 시부모님께서도 아이가 잘못을 하면 따끔하게 꾸짖으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혼내게 되면 안절부절 못하시며 꼭 중간에 들어오셔서 말리는 것이다. 사실은 그럴 경우에 며느리는 더 화가 난다. 아이들도 더 미워진다. 그럴 때마다 심호흡 한번 길게 내 쉬고 소란을 멈추지만 머리 속이 혼란으로 가득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늘 하던 것처럼 스스로 세뇌시킨다. 어떤 조부모님이 손주가 아파하는 것을 좋다고 하실 것인가... 만약 잘 때렸다고 하시면 더 서운한 마음이 들 수도 있지 않을까... 결혼해서 지금까지 지난 시간들만큼만 세월이 지나면 나도 할머니 소리 듣게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도 어린 아이들을 보면 예전 어린 새댁 때보다는 훨씬 너그럽게 보이는데 하물며 할머니가 되어 손주들을 바라보면 얼마나 예쁠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그 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본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어른들 입장만 헤아리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어른들을 대하는 좋은 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버릇없어지고 엄마를 만만하게 생각하게 될 일이 더 걱정스럽게 여겨진다.
이웃에 시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있는데 그 엄마는 아주 똑 소리가 날만큼 분명한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아이들을 혼낼 때 시어머님이 간섭하시면 더 심하게 아이들을 때림으로써 아예 엄마의 체벌에 대해서는 일체의 간섭도 못하시게 했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했던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 교육을 위해 남편과 시어머님만 남겨 두고 삼 년 예정으로 캐나다로 떠날 결정을 할 때도 어떻게 해서든 며느리와 손주들을 못 가게 하시려고 당신 건강을 이유로 말리시는 시어머님께 그 이상으로 충분히 건강하시다는 건강진단서를 떼어 드린 뒤 훌쩍 떠나 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그 며느리는 어느 정도 흉을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 아이들은 엄마의 말을 엄하게 생각하고 잘 따라서 아주 야무지고 똘똘한 아이로 커 나가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아이들에게 모든 기준을 맞춘 엄마이다. 어정쩡한 모습으로 우유 부단하게 행동하는 나와는 전혀 다른 엄마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시부모님이 비교적 기분 좋으신 날에는 나도 아이들 교육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호소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씀 드릴 때 아무리 공손한 태도로 설득력 있게 말씀 드리려고 해도 결국은 아래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정말 시부모님과 함께 살며 지혜롭게 조율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절감, 또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 아이들은 나에게 잘못한 일 그 자체보다 나무람을 듣는 자세로 인해 더 크게 혼날 때가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나무람을 들을 때 어머님 보시기에 결코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며느리가 미우실지 알 것 같다.
그래서 때때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서는 좋은 때를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말씀을 드리게 되는데 그것조차 며느리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일까? 위를 볼 것인가, 아래를 볼 것인가... 지혜롭기란 입술에서 나오는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결코 아님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