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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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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와 청승이라는 여자.


BY 개망초꽃 2003-11-17

'갑자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가을이 다 가기전에 여행을 하잔다.

오백 가지가 넘는 물건들을 놔 두고
천명이나 되는 회원들을 나 몰라라 하고
하루에 몇십명이나 들락거리는 매장을 방치하고 평일날 여행을 떠나자니
이거 보통 결심이 아닌 이상 갈 용기가 앞서지 않았다.

친구는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유혹했다.
하루쯤 자유를 얻는 것도 활력소요 재충전이라 한다.

여행 목적지는 원주 치악산 자락에 있는 들꽃 이야기 찻집으로 정하고
가는 날은 수요일로 대답해 놓고
먼저 직원들에게 얘기를 했다.
가격표가 없는 물건에게는 가로 이센티 세로 일센티 하얀 스티카로 몸값을 붙혔고,
빠진 품목을 메모지에 적어 수요일날 출발하기전 아침에 집에서 컴으로 발주할 준비도 하고,
전날 욕탕에 물을 받아 목욕도 하고 아래 위 내복도 준비했다.
산이 있는 강원도 땅은 여기 보다 추울거라는 노파심,아니 중년파심 때문에......

드디어 수요일,
일찍 일어나니 늦가을비는 땅바닥에 철푸덕 내려 앉고 있었다.
치악산 자락을 산책하려 했더니 그건 포기를 해야겠구나 하면서
비가 종일 내린다는 일기 예보로 인해 여행이 여간 성가신가아니였다.
내가 장사를 안하면 손해가 얼마고?
다음날 할 일은 밀려 날 곱배기로 피곤하게 할 게 뻔한데
여행을 떠난 다는 것이 내게 있어 사치가 아닌가하는 자괴감까지 밀려 들어왔다.

'갑자기' 친구와 약속을 하고
하루 동안의 자유를 얻었다 했다.
우리가 가고 싶은 여행지는
내 고향인 원주이면서
또 내가 꿈꾸는 들꽃 이야기가 있는 찻집이면서
내가 요즘 제일 편하고 좋아하는 '갑자기' 친구와 함께면서
뭐 하나도 싫은 게 없었다.
여행할 날을 머리속에 그리고 쓰는 며칠동안은
소풍을 기다리는 철딱서니 없는 아이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하는 향긋한 그리움이었고
새로운 계절이 마악 바뀌는 가슴 잔잔히 뛰는 설레임이었다.

전화를 걸어봤다.
혹시나 친구가 조금이라도 귀찮아하거나 망설이는 말투라면
비가 종일 온데 고생만 할게 뻔한거 아니니? 하면서 선수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달리 '갑자기'라는 별명이 붙었겠냐 말이다.
"응 준비 다 되어가 쫌 이따가 터미널에서 만나자."

갑자기라는 별명을 가진 여자와
청승이라는 별명을 간직한 여자가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났다.
자유라는 가방을 어깨에 하나씩 둘러매고
철푸덕 거리는 비를 막으려 우산 하나씩을 손에 들고
차표 하나씩을 다른 한손에 쥐고 원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차안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비어 있는 자리가 더 많았다.
차 속은 고철 음료수 깡통 같았다.
음료수 깡통은 뒤로 후진을 했다가 좌로 돌려 나가다가 우로 휙 돌려 달려가더니
갑자기 급정거를 하면서 울컥 서더니,쿨럭거린다.
"에구,멀리날 것 같다."
이 말에 나도 전염이 돼 어지럽더니 가슴이 새가슴이 되어 콩닥이더니
뱃속이 임신초기 때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려 했다.

이러다가 갑자기라는 여자와 청승이라는 여자가 만든 소중한 여행을 망칠 것 같아.
가방에서 먹을 걸 담은 비닐봉지를 얼른 꺼냈다.
비닐안엔 오징어,현미쌀과자,귤,사과즙과 보리차가 색색이 어울려 가을잎처럼 곱다.
우린 먹었다.
먹으러 여행을 준비하고 먹을려고 버스에 탄나 봐 하면서 웃다보니
그러다보니 멀미도 잊어버리고
차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가 내려 그런가?
아직도 끝질기게 남아 있던 나뭇잎이 빗물을 흠뻑 들이켜 팅팅하고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나무 위에 붙은 잎과 나무 밑둥에 떨어진 잎이 미술 시간에 그렸던 데깔꼬마니 같다.
우린 감성이 서로 같아서 창밖 풍경 이야기만 하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몰라했다.

버스를 탄지 두 시간 삼십분만에 원주에 도착했다.
원주엔 또 다른 친구가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친구 별명을 부치자면 수다쟁이거나 입만동동이라고 하면 딱 맞는다.

점심은 굴뚝이라는 곳에서 먹었다.
양은 도시락에 김치 송송 썰어 깔고 들기름 한숟갈 넣고 그 위에 밥을 얹은 도시락.
초등학교때 강원도 고향에서는 겨울이면 매일 싸서 난로에 데워 먹었는데
이런 추억의 도시락을 그대로 재연한 주인이 대단해 한번 더 쳐다보게 되었다.

그 다음은 내가 꿈꾸는 대로 가꾸어 논 들꽃이야기 찻집으로 가서
따스하면서 시큼털털한 야행화 발효차를 마셨다.

갑자기와 청승과 입만동동 세 여자가
깨진 항아리 뚜껑에 파란 이끼가 자라고 그 이끼 사이로 물매화가 청아하게 피어있는
찻집에서 이야기만 했다.
입만동동 친구가 나보고 남자를 잘 사귀려면"그건 싫어" 이런말을 하지 말란다.
그런말을 하는 입만동동도 얼마전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다고 하더니
지금은 연락을 안한다고 하면서......

사람사는 일이 자유롭지 못하다.
구속하지 않는 일상을 사는 입만동동 친구나
구속 당하고 사는 나의 일상이나
무슨 일에서든 내 마음처럼 되어 내가 걷고 싶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살다보면 내가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좋은척도 해야하고
걷기 싫은 빗길도 도시길도 고속도로도 걸어야 한다.
걷기 좋아하는 산길이나 들꽃핀 길이나 호수로 난 길만 걸을 수는 없다.

종일 흙바닥에 비 떨어지는 자국만 보았다.
종일 입만동동 친구 말주변에 손뼉을 치면서 옆에 있는 갑자기 친구를 때려가면서 웃었다.
청승떠는 난 들꽃에 반해 들꽃과 눈을 마주치고
멀리 낙엽송이 물든 누우런 치악산도 하염없이 보았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우린 잠만 잤다.
갑자기도 청승이도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잤다.
밖은 어두워 친구 얼굴이 지워져 보이지 않았다.
눈만 푸르게 돋아나 걷기 싫어도 걸어야하는 서로의 길로 돌아갔다.
친구는 지하철을 타고 나는 버스를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