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높이 사랑을 위하여
새는 날아갔다. 부모의 그늘아래 감성이 있는 정서 속에서 기쁘고 밝게 살아주길 바랬는데
그 새는 날아갔다.
세상 밖으로 날아간 새는 이렇게 말을 한다. 멀리 나가보니 울긋불긋 세상 빛이 제 눈엔 아
름다운 낭만이 있고, 그냥 푸드덕거리며 나는 새보다는 뛰고 싶은 야생마가 되고 싶단다.
불신과 사고와 천방지축인 낭만이 풍요로운 세상이, 십 구 년이란 세월을 잘 살아온 아들의
갑작스런 변화에 정신이 아찔했다. 기상변화 같은 자기 빛깔을 나타내며 변해 가는 아들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일상적인 말, 착하고 겸손과 온유하고 공동체 안의 윤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 한 것이 지겨웠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누구나 부모라는 권위의식 때문에 자식의 의견은 아직 어리니까, 네가 대
학가면 이라는 말로 일관해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대학이라는 명분하에 세상밖으로 빨리
탈출해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들 시대와는 아주 판이하게 변해가는 그네들 모습. 컨츄리 음악보다는 락 음악을, 트위
스트 춤을 추었을 뿐인데 온몸을 흔들어대는 광열한 춤을 좋아하는 청소년의 심리를 부모들
이 얼마나 이해하게 되는지.
눈높이 사랑을 원한다고 했다. 부모의 눈에 맞춘 자식으로 키우지 말고, 자식 눈에 알맞는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해 달라는것이다.
사랑하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이해하면 믿어 주어야 한단다.
아들이 고3 일 때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허리에 무리가 와서 오래 앉아 있을수 없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치료를 받아도 고3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웠고 쉽게 치료가 안되었다. 하필
이면 이런 시련이 와서 마음의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하루에도 몇번씩 좌절 속에 희
망을 잃어 가는 것이 안쓰럽고 애가 탔다.
공부보다는 건강이 우선 이라 대학을 포기하려고 했고, 우리의 입장보다는 아들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해 주며 남하고 비교하기보다는 그 고통 안에서 스스로 만족하고 기쁨을 느끼며
생활하게끔 해 주었다.
방에서 시끄러운 락 음악을 들으면 음악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고, 춤을 추고 싶다면 함께
디스코를 추었다. 가끔씩 꾀병이 아닐까 의구심도 났지만, 병원에서는 치료가 안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니까 아픔을 함께 나눌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 상전이라 더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고3을 보내고 대학을 가더니 올가미 속에 갇
혀있던 마음은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갔다.
이제는 객지에서 생활해 가는 아들을 한 달이면 한 두 번 만나는데 또 다른 모습으로 성장
해 가는 것을 느낀다.
날개 달린 옷을 입은 것도 만족치 못해 뛰어 다니는 야생마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는 아들이
한편으로는 다른 길로 빠질까봐 걱정도 앞선다.
새와 야생마는 본질이 다르지만, 청춘과 젊음이 동일한 나이에 맞는 고을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이해하려고 한다.
소년에서 청년이 되고 청년에서 어른이 되는 성장의 변화일지언정 가슴속에 확고한 신념과
중심, 그리고 남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은 변하지 말았으면 한다.
사나이로 태어난 자부심과 건강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물질적인 소유보다 마음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면 억만장자의 부자보다 더 풍요한 생활로 한 생을 살수 있지 않을까.
젊다는 삶 안에서 필요와 불필요한 경험을 하는 것도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성경에도 모든 사람들마다 각 사람에게 맞는 그릇이 있고 몫이 있다고 했다
새가 되든 야생마가 되든 그것은 잠시 뿐이라고, 서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기에 조심스럽게
지켜본다.
걸상 위에 올라가야 아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현실이 힘겹다는 것을 아들은 아는지.
내 곁에 몇 달째 돌아오지 않는 새는 무엇이 그리 바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