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으로 2월생인 나는 7살의 나이에 국민학교에 입학을했다.
낳을때부터 워낙 작았던 난 학교에 입학해서도 조회시간에 줄을 서면 두번째 아니면 세번째 정도에서 줄을 섰다.
나의 할머니는 내가 어릴때 둘이 있는 한가한 시간에 늘 물으셨다.
"옥아 니 생일이 언제냐? 응 할머니 이월 스무닷새..."
엄마를 일찍 여의고 외할머니의 품에서 자란 내가
당신께서 눈을 감으시면 훗날 행여 생일이라도 못 찾아 먹을까바
주입식으로 머릿속에 입력 시켜 놓으려고 그러신 것 같았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시는 말씀이
"너를 처음 낳았을때 꼭 저기 달린 시계만 했었단다.(좀 작은 괘종시계가 철도 관사집 안방에 걸려있었다.)
꼭 개구리만한게......
에미 뱃속에서 제대로 먹질 못해 얼굴은 쭈글쭈글한게 그래도 씨익 웃으니 보조개가 예쁘드라......"
할머니의 말씀인즉슨 "느언니가 너 때문에 엄마 돌아가시게 생겼다고 누워 있는 너를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걷어차기도 했었다"고 말씀하셨다.
낳았을 때부터 작은 나였지만 6살경엔 글씨를 더듬더듬 읽고
(지금은 두세살에도 글씨를 읽는다지만 그때는 한글을 깨치고 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동화책과 집에 있는 잡지책 신문의 영화포스터도 곧잘 들여다 보곤했다.
오빠들이 가르켜 준 팝송 "케세라세라"도 흥얼흥얼~~~
다 큰 오빠들 틈에서 자랐으니 보고 듣는게 많아 영악스럽다고나 해야 할까?
아뭏튼 의식이 많이 깬 아이였을 것이다.
국어를 무척 잘해 받아쓰기는 항상 백점을 받았는데
수의 개념이 약해 산수는 젬벵이어서 30센티 자막대기로 수도 없이 많이 맞았다.
오빠는 답답해서 "아이고 요 맹추 같은 년아 이것도 모르냐?" 하며
철석철석 손바닥 때리기를 부지기수...
그럴라치면 할머니가 자로 아 때리면 피 마른다고 질색을 하시고 옆에서 거들어 주셨다.
이쁜짓과 맹추짓을 골고루 하면서 열심히 학교에 잘 다니고 있는중에 선선한 가을이 되었다.
우리반에 이옥례와 정명옥이란 애가 자기들 집에 놀러 가자는 것이었다.
자기네 집에 가면 배추꼬랑지(그땐 조선배추와 호배추가 있었는데 조선배추꼬랑지의 맛은 지금의 튼실하게 잘 자란 순무의 맛과 비슷하다. 물론 특유의 그 맛을 따라 갈 수는 없지만... )
가 많으니 그거 준다고 나를 슬슬 꼬득이는 것이었다.
그때 아마 걔들 눈에는 내가 지들과는 다른 세계의 아이인 것 같아 보였었나부다.
하긴 요즘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압구정동에 사는 심이었고 그아이들은 촌에 사는것인데...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우리들이 부러웠다는 촌동네 살던 여자친구의 말이다)
먹을것이 궁하게 사는 나도 아닌데 배추꼬랑지에 현혹되어 왜 거길 따라갔는지 모르겠다.
조선배추꼬랑지의 매꼼하고 배틀하게 끌리는 맛이 나를 유혹 했었나보다.
저녁에 배웅해 줄 것을 약속 받고 학교가 파하고 난 후 그아이들을 따라 생전 처음 신평리(지금 일산신도시 들어가는 초입이 되었다)라는 동네에 발을 디뎠다.
산은 없고 논과 밭만 있는 동네였는데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못하는
전형적인 벌판형태의 동네였다.
선생님이 가정환경난에 아버지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품팔이"하신다고 말하던 옥례..
예나지나 호기심이 많던 나는 친구에게 "옥례야 품팔이가 뭐야?"
옥례는 머뭇머뭇 거리며 말을 못이었다.
부모님이 품팔이를 하신다는 친구네 집은 일자형태의 방과 부엌이 있는 옹색한 집이었다.
그곳의 집들은 임시 지은 집 같이 다 허름해 보였다.
같은 반 친구인 명옥이네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잘 놀았는데.
해가 슬슬 저물기 시작했다.
난 겁이 나서 "애들아 나 데려다 줘야지" 하였더니 두친구 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밭에 김장을 할 만큼 배추가 통통하게 자랐을 때이니 겨울이 가까워 졌다는 이야긴데
눈깜빡 할 사이에 해가 빨리 사라진다는걸 어린내가 알 턱이 있었겠는가?
조급해지고 놀랜 마음에 행장을 꾸리고 해가 지는 신작로 길로 나섰다.
어린나이에 사람들의 인적도 없는 길을 아마 십리길은 좋이 걸었을 것이다.
가도 가도 논만 보이고...
길은 왜 그리 길고 멀던지...
집에 가서 매맞을 것도 무섭고...
두려움과 조바심에 떨며 그 먼길을 땀을 뻘뻘 흘리고 초죽음이 되어 울며 불며 뛰어 집에 당도 했을 때
내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식구들이 안도감과 반가움에 나를 얼싸 안았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친구 말은 전적으로 믿을게 못되고 애들은 해지기 전에 다녀야 한다는 것..
귀소본능이란게 참으로 무서운 것임을 느낀
조선배추꼬랑지 사건이었다.
1961년 늦가을 이맘때 쯤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