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넘게 한 직장에 몸담으며 생활하다 보면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참으로 지루하게 다가설 때가
있다.
유난히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무는 날에는
보고 싶은 얼굴 떠올리며 전화를 건다.
잘은 못하지만
술한잔 앞에 두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가슴속에 담아둔 삶의 애환을 모두다 털어내고
정화된 마음이 되어
다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게 해 주는
묘한 힘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갓 스물서부터 사십이 다 될 때까지
늘상 같은 사람을 지켜보다 보면
그 사람의 좋은 점, 그렇지 않은 점 모두를
속속들이 알게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먼저 바라볼 줄 아는
배려감이 생겨나는 것은
그렇게 오랜 세월이 앞에 놓여 있어서 일까?
지금도 나의 이름 석자 불러주는
정겨운 얼굴들이 있으니
그런 지금이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여자동료 뿐만 아니라
남자 동료들도 있다.
요즘은 세상이 하도 이상해서 그런지
남녀가 함께 다니면
부부인지 아닌지 가늠하며
사람들을 살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신경이 쓰일 때도 있지만,
좋은 친구, 아니 인생의 좋은 선배님으로
늘 그자리에서 그만큼의 예의를 갖추며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어느새 분위기는 오빠, 동생같고,
시시콜콜한 가정사 이야기도 스스럼 없이 터 놓게 된다.
항아리에 담긴 찹쌀 동동주의 색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맑고 깨끗하다.
조롱박으로 한잔씩 채워 서로에게 건네다 보면
술이 익어가듯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정이 익어 간다.
그렇게 오랜 세월 알아 오면서도
서로들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기에
지금처럼 편안하고, 스스럼 없는 돈독함으로
남을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얻어진 거라면
내가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여자라는데서
얻어지는 자부심과
내 주위의 여러 정든 이들이 아닌가 싶다.
여섯시 땡 하면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따뜻한 저녁밥을 챙겨주고 있어야 할 내가
가끔은 그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잠시 나를 잊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
마음을 나눌 때 나는 또 다른 행복감에 젖는다.
아까부터 핸드백에서
이은미의 어떤 그리움이라는 노래가 울려 대고 있다.
딸아이가 엄마를 찾는가 보다.
아직도 이야기를 마치려면 시간이 좀 걸릴듯 싶은데 ...
갓 입사했던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지금껏 한 직장에서 지내왔던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어찌 그리도 시간 가는줄 모르겠던지
늘 헤어짐의 시간들은 아쉽기만 하다.
술기운 때문은 아닐진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핸들 잡은 나는 싸늘한 가을 저녁 공기의 상쾌함을 가르며
다늦은 저녁 그제서야 귀가를 서두른다.
난 참 가진게 많은 여자란 생각을 하면서 ...
자꾸만 터져 나오는 엷은 미소를 애써 감추지 않으며
가슴을 적시는 음악소리의 볼륨을 한껏 올린다.
가슴이 따뜻해져 돌아가는 그 길에서는
싸늘한 가을 저녁 공기도 그토록 상쾌하기만 하다.
그래 ...
그런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 한 것일꺼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