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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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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주는 유서처럼 쓴 편지.1


BY 방.울.이 2003-09-23

50개월 13일 (태어난지 1537일째)


사랑스런 내 딸 유진에게!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언젠가는 조금씩 들려 주고 싶었단다.
뭐...별 특별할 것도 없는 삶이지만
우리 사랑스런 유진이가 어느 정도 자라 성인이 되면
혹여라도 조금이나마 삶의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으로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써 본다.
사람의 일이란게 또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정말 유서한장 없이 어느날 사고로 가는 일도 있으니
물론, 그런 일이야 없어야겠지만.....
여하튼 그러한 심정으로
유진이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내가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오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단다.

초딩 이전의 시기는 별 기억나는게 없네.
두살 터울의 언니가 초등학교 들어간 후
집앞 개울가에서 친구랑 놀다가
언니가 학교 파하고 올 무렵 언니 마중을 나갔었지.
동무들과 책가방 들고 오는 언닐 반기며
언니가 들고 있던 책가방 빼앗듯 받아들고
좋아라 깔깔대며 집으로 왔었지.
연년생 남동생이랑 늘 툭닥거리며 싸우기도 했던
아련한 기억이 묻어나네....

그렇지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픈 맘은 안 드네.
별 다른 기억이 없으니 말야....

초딩 시절의 기억은 어떤게 있을까....?
동무들과 어울려 나무 위에 올라가 깔깔대며
이야기꽃 피우던 기억이 있기도 하고,
징검다리 건너 다니며 냇물을 건너던 기억....
소풍때면 근처 수승대로만 늘상 다니던 기억....
그냥 조그만 공원에 불과할 뿐이었던 곳이
지금은 화려한 국립공원이 되었더구나.
그리고 뒷동산에 군불떼는 장작나무 주우러 다니던 기억....
언니들 소몰고 풀먹이러 가는데 따라 다니던 기억....
농사철이 되면 학교도 빼먹고
다섯살 어린 막내동생 업고 돌보아야 했던 기억....
명절이 되면 도시 나가 있던 언니들이 사 오는 선물 꾸러미 기다리느라
동구밖까지 나가서 따가운 햇살아래 지나가던 차들을 바라보던
태연한 기억들.....
초등 5년때 살던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이사하며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하며 첨으로 이별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

아마도 내 고향에서의 기억은
이것들이 거의 전부가 아닐까 싶다.

부산으로 이사해서 낯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에서 다니던 여중시절......
고향에서의 다른 억양이나 사투리, 어투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아서인지 성격은 점점 내성적으로 변모했지...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 더욱 안으로 수그러들고
남앞에 나서는걸 두려워했단다.
사춘기를 별로 앓았던 기억은 없는데도
물과 기름같은 느낌으로 학교생활을 했었지.
시골 억양 때문에 친구들한테 받는 놀림도 싫었고
수업시간에 발표시키는 선생님도 싫었단다.

공부 그저 그렇고 발표력 없고 소심하고 적응력 없었던 성격은
고딩때도 여전했었지.
친구들도 아주 친한 친구 두세명 외엔
아예 말도 안했단다.
1년동안 한 반에서 지내도 말한마디 안 해본 친구도 있었으니
반에서의 난 정말 인기없는 아이였어.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써클활동을 하던 미술부에선 인정을 받았다는 것과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는 것......
그렇게 쑥맥이었던 내 성격에
그래도 가졌던 재주가 있었으니
그건 작문 실력과 미술 실력, 그리고 필체였단다.
백일장이나 사생대회에선 늘 상을 휩쓸었고
필체가 좋아서 선생님들의 판서대필은 늘 내가 맡았었지.
성적표나 학급일지는 물론
선생님들의 사적인 것들까지도 대필해 드리면서
선생님들껜 그나마 늘 인기였지.

그때 친했던 친구들은
15년, 20년이 지난 지금도 친형제 자매 이상으로 친하게 지내지만
그다지 그리운 학창시절은 못되는구나.

그러다 대딩.....
가정형편으로 어렵게 들어갔던 대학은
1학년 여름방학이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던 난
휴학도 아니고 자퇴를 해야만 했었지.
여대생.....
얼마나 꿈꾸던 여대생이 되었는데....
당연히 취업을 할려고 상고를 다녔던 내가
당당히 4년제 미대에 합격했었는데
형제가 많았던 우리집에서 4년제 대학은 꿈도 못꿀 일이었지.
고딩때 미술선생님께서 내 실력을 아까워 하시어
지나가듯 한마디 하신 적이 있어.
"그림 실력이 너무 아깝다.....
대학 가진 않더라도 시험만이라도 응시해 보는 게 어떻겠냐?"
미술 선생님의 그 한마디에 힘입어
대입 두어달 남겨 놓고 학력고사 준빌 했었지.
얼떨결에 합격이 되자.....
수백명이 응시했던 모교에선
나를 포함한 7명만이 합격을 했단다.
그 때, 내 마음은 환희보단 커다란 슬픔으로
가슴이 아팠단다.
어차피 다니지 못할 대학이라 생각하니....
어디 기댈곳도, 하소연할 곳도 없이 참으로 막막한 일이었지.
나에게 행운이란 건 없는 건가.....
요행을 바라기도 했었단다.
73만원이라는 입학금은 나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었지.
헌데, 어떻게 한 학기라도 대학을 다녔냐구....?
암으로 수술받고서 누워 계신 아버지께서
꼬깃꼬깃 뭉쳐둔 때 묻은 돈과
시집 간 언니가 형부 보너스 탔던 돈.....
반대하던 엄마 몰래 그렇게 등록 마감날 가까스로 등록하고서
겨우 한 학기를 여대생이 되는 환희에 젖었단다.

내 인생에도 그런 행운이 있었지.
단지 한 학기였지만.......

누군 공부도 못하고 그림도 못그리니 뒷문으로 돈 주고 들어왔다느니 소문이 무성하고
그리하여 그 친굴 왕따시키기도 하고,
일류대학이 아니라 쪽 팔리다느니 불만 투성이인 친구들도 있었지만
난 그저그저 현실에 감사한 마음 뿐이었단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생각하면
무얼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겠단 마음에 어둠이 자리잡긴 했지만
친구들 미팅이다, 나이트다 돌아 다녀도 하나도 안 부러웠단다.
오로지 돈을 벌어 다음 학기 등록금만 마련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으니까....
과친구들 중 집안 형편이 남부러울것 없는 친구가 있었단다.
자기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며두고 거기서 그림을 그린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 친구는 강의가 끝나면 커피숍으로 달려 갔단다.
집안도 넉넉하고 얼굴도 이쁘고 키가 큰 그녀는
커피숍에서 서빙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단다.

내가 만약 그녀의 입장이라면
작업실이 갖춰진 방에 가서 열심히 그림만 그릴텐데....
그림만 그릴 수 있는 여건의 친구들이 무지 부러웠었지.
그 때의 내 머릿속은 온통 그림 생각 뿐이었고
온갖 아이디어들과 그림 구상으로 머릿속은 늘 가득찼었지.
그런 나는 돈 걱정없이 오로지
그림 그릴수 있는 시간과 공간만 자유로이 주어진다면
더 이상 바랄것이 없다고 생각했었기에
형편이 넉넉하고 예쁘고 키가 큰 그 친구를 이해를 못했었지.

어느날 그 친구한테 왜 알바를 하냐고 물어 보았단다.
그녀 왈, 다양한 삶을 체험하기 위해 알바하는 중이고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하고자 한다고....
그때부터 내 맘 속 깊숙히 그녀가 자리잡았지.
정말 멋진 그녀....부럽기 그지 없었단다.

나는 키도 작고 못생겼고 가정환경까지 형편없는.....
무엇하나도 뒷받침되는 게 없었던 나는
커피숍에 알바 구하러 가도 볼품없는 외모에 거들떠도 안 보던걸....
어쩌다 날 받아주는 커피숍이 있어 일하긴 했어도
시급 몇백원씩 주는 알바로 다음학기 등록금은 고사하고
미술재료들 사기에도 부족했었지.

부산 서면로터리쯤에 있던 어느 커피숍에서 알바하던 난
또 한명의 존경스러운 친굴 만났었지.
아....그 커피숍 자리는 지금 롯데백화점이 화려한 자태로
서 있는 자리이기도 하지.

그 커피숍에서 만난 친구는 정말 모르는게 없는 친구였단다.
내가 미대 다닌답시고 열심히 공부하던 미술학도였는데도 불구하고
고졸인 그녀보다 미술에 대한 상식이 뒤졌으니....
미술 뿐만 아니라 음악이면 음악, 철학이면 철학, 가정, 사회, 상식까지도
누가 물으면 척척 전문가처럼 알려주고 조언해 주지 뭐니.

그 친구한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모르는게 없냐고 물어 보았지.
그 친구 왈, 잡지 하나를 보더라도 대충 보지 않고 유심히 보고
만나는 사람 어느 누구한테건
하나라도 그의 특징을 배우려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대한다는 대답을 해 주더구나.
그 친굴 대하면서 정말로 내가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 친구의 그 한마디가 십오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채찍질하는 말로 들린단다.
그 이후 나도 그녀를 조금이나마 닮을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지.
다양한 삶, 다양한 체험들을 하기 위해 많은 책들을 접하고
접한 책 속에선 단 하나라도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지.
내 것으로 소화한 다음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준다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겠니?
그녀를 늘상 가슴에 새기며 삶에 임했단다.
그 결과인지 어느날부터인가는 나도 그녀처럼 질문을 받기 시작하더구나.
어쩜 넌 모르는게 없냐....?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스무살적 만났던 그 친구 얘길 해 주지....

그리고 또 내 인생에서 뺄 수 없는 한 부분이라면
<点心文藝會>와의 인연이란다.
젊은이들의 문학동아리였는데....물론 지금은 사이버 동아리로 맥을 잇고 있지.
첨엔 여기서도 적응을 못해 힘들어했단다.
자칭 문학인들이라 일반 사회인들과는 사상이나 사고가 달랐지.
순수문학을 지향하던 나는 이념적인 부분을 소화 못해냈고
문학을 떠난 개개인들간의 성격이나 분위기조차 합류할 수가 없어 애를 먹었단다.
그러다 탈퇴하기로 맘을 먹고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탈퇴하기로 맘 먹었던 순간, 오히려 더 강하게 집착하게 됨을 느꼈지.
그 때, <늪>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는데
빠져 나오려고 하니 더 깊이 빠져드는 나 자신을 발견했었지.
그로부터 나의 20대는 <점심문예회>가 없는 나를 얘기할 수 없게 되었단다.
각종 시낭송회, 시화전, 연극공연, 문학비평....등등의 행사들을 직접 주관하며
업체들로부터 스폰서 받는 일부터 팜플렛, 티켓, 진행에 이르기까지
회 자체내에서 해야만 했으니 일이 고되고 벅찼지만
보람도 많았고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단다.
아마도 이 동아리가 아니었다면 난 그 시절
직장 다니면서 외국어 학원이나 컴퓨터 디자인학원을 다녔을 게다.
그런 학원을 다니다가도 <점심문예회>에서 행사가 있으면 빠지기를 여러번....
그래서 때로는 동아리를 벗어나 볼까도 심히 고민하고 갈등하던 시절이 있었지.
그 동아리 때문에 못한 일들도 많았지만
더 소중한 것들도 많이 얻었음을 무시할순 없단다.
어쩌면 내 젊은 피를 받아준 곳이 아니었나 싶다.
언제 또 그같은 열정으로 삶에 매달릴수 있을런지......
벌써 그러한 일들이 과거가 되어 버리다니.....

지금은 <점심2세>를 키우느라 다들 여념이 없단다.
유진이도 당연히 그 대열이지....
그나마 난 얼마전부터 유진이 육아일기를 쓰면서
그 사이트에도 나의 칼럼을 따로 만들었단다.
육아일기를 여기저기 올리게 되니
게으름과 나태함이 사라져서
피곤하고 힘들기는 해도 열심히 쓰게 되네.



====2탄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