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탄에 이어.... 그러다 한 학기가 지나 버리고 병으로 앓던 아버진 급기야 돌아 가시고.... 여름 방학 중인데도 학생들은 데모하기에 바빴지. 민주 노동 어쩌고....전두환 정권 어쩌고.....학내 문제 어쩌고..... 다들 난리였지만 난 동참할 마음 손톱만큼도 없었지. 당장 다음 학기 등록금이 문제였으니 그런 데모에 동참할 시간적 여유는 물론이고 정신적 여유도 전혀 없었지. 내가 다니던 그 대학은 여대라 그런지 사회적인 문제보다도 학내 문제를 더 크게 다뤄 데모를 했던것 같다. 음--. 지금의 신라대학교..... 예전엔 연산동에 자리한 부산여대였었지. 지금은 연제구청이 들어선 자리야. 현재 괘법동에 신라대학교가 버젓이 멋드러지게 서 있는건 아마도 그때 87년 여름의 뜨거웠던 데모 덕분이 아닌가 싶다. 이사장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부산여대가 장차 남녀공학으로 바뀌고 괘법동으로 이전한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내고 실상은 아주 오랜 기간동안 아무런 작업 진전도 안 시키고 있는 터라..... 재학생 및 졸업생들까지도 동참한 큰 데모를 일으켰었지. 언제까지 작업 완료한다는 확실한 일정을 받아내지 않으면 전교생 2학기 등록금을 거부한다는 엄청난 조건을 내세웠었지. 그 때 난..... 차라리 전교생 2학기 등록금 거부 판결을 간절히 기다리는 못난이가 되어야만 했단다.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데모건은 잘 타결이 되어 급기야 학교를 그만 두는 수밖엔 아무런 대책을 못세우고 말았지. 꿈같던 여대시절을 그렇게 접고 그때부터 직업전선에 뛰어 들었지. 미술학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조그만 회사 경리에서부터 대기업 사무실의 한 여사원이 되기까지..... 지극히도 내성적이고 배타적이었던 내가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고 얼마나 많은 실수들을 하며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었는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정을 받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과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지. 사회생활에서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면서부터 인정을 받게 되면 나도 모르게 자만심에 빠지게 되더구나. 그래서 잘난 체도 하게 되고 타인을 무시하게도 되지. 그럴때 나를 적절히 조절해 줄 수 있는 최대의 무기는 마음의 양식을 쌓게 하는 양서였단다. 어느 순간, 사회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인정받으며 고참 노릇하다 보니 또 어딘가 맘속 허전함이 느껴져 다시 야간대학엘 도전했었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미술관련학과는 야간에는 없어 하는수없이 일본어학과를 선택했단다. 제2외국어는 필수라.....혹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지 하는 좀 막연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그도 쉬운 일은 아니더구나. 외우고 입으로 되뇌어야만 하는 외국어 공부라 출퇴근 길에서도 늘 이어폰을 귀에 꼽고 다녔지. 직장마저 시외(양산)에 있어 출퇴근 시간만도 장난이 아니라 몸은 늘 녹초가 되면서도 맘속은 뿌듯했단다. 젊을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내가 벌어 내가 대학 공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을 뿌듯하게 하기에 충분했지. 물론 학점은 형편없었지만.... 졸업이 가까워지자 부족한 학점 때문에 결국은 직장을 그만둬야 했단다. 직장이 너무 멀어 늘 첫교시는 출석도 못해서 학점은 펑크가 났고 졸업학점을 이수하지 않으면 한 학기를 더 다녀야만 할 상황이 되어 어쩔수 없이 학교를 택했단다. 그 일로 두고두고 엄마한테 잔소릴 들어야 했지만 늦게사 들어간 대학을 또다시 포기할순 없었지. 그 때 내 나이 스물 여덟이었단다. 인생에선 계속 하나 하나를 선택해 가며 살아야 하지. 때로 후회되는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선택한 일에는 최선을 다하며 임했던것 같다. 형편없는 학점이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졸업을 하고 예전 직장에서 인연이 됐었던 골프신문사 사장님 스카웃으로 그때부터 신문사, 잡지사 일들을 시작하게 되었지. 사진촬영하고 취재하고 기사쓰는 일들이 어쩌면 내 적성에 그리도 잘 맞는지..... 부산을 비롯한 경남,경북, 대구 등지까지 열심히 다니며 취재에 임했었단다. 다방면에 걸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내가 알려 주는 것보단 배우는 게 훨씬 많았지. 대부분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취재하다 보니..... 성공하는 사람들은 뭔가 특별하단 인상을 받았단다. 인상에서부터 삶의 태도, 타인을 대하는 자세, 부지런함, 남다른 사고방식..... 게으른 사람들의 불행이 어쩌면 당연시 느껴지기도 했지. 그들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성공자의 대열에서 누군가에게 특별한 만남을 제공하고픈 욕구를 가졌었단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관심없었던 내가 서른하나의 늦은 나이에 한 남잘 만나 결혼을 했단다. 진정코 사랑을 위한 결혼을 하리라 맘먹었었고 결혼을 위한 결혼이라면 아예 안하는게 낫다는 생각을 가졌던 나....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사랑이 나타나기 전엔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나.... 주변에선 나이 서른을 넘기니 늙었다고들.....하더구나. 볼때마다 인사치레가 시집 안가냐? 였고 급기야는 명절이 되어도 오시는 친척 어른들이 안 반갑게 되더군.... 나이에 신경쓰지 말자고..... 나이 때문에 어쩔수 없이 하는 결혼이라면 차라리 안하는게 낫지.... 그러던 내가 한 남잘 만난지 두달만에 한 결혼이라 다들 의아해했지. 참 요상한 것이.... 그렇게 확실한 주관과 신념으로 버티던 내가 아는 분의 맞선(예정에도 없이 갑자기)으로 어느날 늦은 저녁때 한 남잘 만나 그 담날 프로포즈를 받고서 결혼을 결정해 버리니...... 사랑이랄 것도 없이 이게 인연인가.....? 이 정도면 되겠지.....? 막연한 기대감으로 하지 않았나 싶다. 결혼에 때로는 후회도 하면서 때로는 행복에 겨워도 하면서 내 사랑스런 딸 유진이를 만나게 되었고..... 나 스스로는 비교적 쉽지 않은 삶을 살았던 듯한데 글쎄.....더 어렵게 사신 분들이 보면 웃으시겠지? 만약에 누군가가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면.... 난 다시 돌아 가고 싶지가 않단다. 유년시절을 비롯하여, 중딩, 고딩, 사회생활하던 청년기...... 그리고 결혼생활까지도.... 다만, 유진이를 잉태했을 때 그 시기로 돌아 간다면 흔쾌히 응할 수 있을 것 같다. 들려주지 못했던 많은 음악들 들려 주고 싶다. 유진이에게 음악을 맘껏 들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빠에게 책임이 있는듯.... 오디오 한대 사 달라고 졸라도 총각때 듣던 마이마이 카셋트로 들으라고 하니.... 설겆이를 할 때나 요리할 때나 늘 음악에 묻혀 다양한 음악들 기분좋게 늘 들려주고 싶었는데 그게 너무 아쉽다. 그리고 좀 더 열심히 태담을 들려 주고 싶고. 주변에서 태담하는 이들을 못봐서인지 나조차도 쑥스러워 제대로 못 들려준것이 늘 아쉬웠단다. 눈에 직접 보이는 아기가 아니어서인지 말로서 건넨다는 게 쉽지 않더구나. 다시 우리 공주를 잉태한 시절로 되돌릴 수 있다면 책도 많이 읽어 주고 많은 얘기들 들려주고 싶어. 그리고 게으름으로 인해 매일매일 꼬박꼬박 태교일기를 쓰지 못한게 많이 아쉽단다. 뱃속에서도 너무나도 온순했던 유진이.... 입덧이라고는 아예 모르고 지냈고 뭐가 먹고 싶다거나...특별한 증세조차 없어 오히려 내가 불만이었으니.... 아빠한테 뭐가 먹고 싶다고 투정도 좀 부리고 싶었는데 임신 열달동안 그런 일 한번 없었으니 엄마 뱃속에서부터 효녀였나봐. 태교일기부터 육아일기를 그때 그때 제대로 쓰지 못한게 못내 아쉬워 지금이나마 열심히 쓰고 있단다.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 간다면 일기를 열심히 써서 우리 유진이 이 담에 커서 시집갈때 선물로 주고 싶구나. 그나마 임신기간동안 만족할 수 있는 일이라곤 꽃꽂이, 아트플라워, 홈팻션, 양재......를 배우러 공예학원을 다녔었지. 아빤 무리한다며 잔소리도 지독했고 반대도 심했었지만 만삭이 될때까지 끝끝내 다녔단다. 태교란 뱃속에 있을 때 아니면 소용이 없는 거거든. 우리 유진이 엄마 닮았으면, 또 엄마의 태교를 열심히 받았으면 아마도 손재주 하난 끝내 주리라 확신한단다. 우리 사랑스런 유진이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기를 바라고 아름다움을 직접 조각해 낼수 있는 능력을 갖기를 바란단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신만의 기술을 터득하기를 바란단다. 또한 그 아름다움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길을 택하기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진이 이름에 대한 전설을 남겨 두고자 한다. 부드러울 유(柔), 참 진(眞)을 썼지.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없는듯 있어야 하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진실되고 참되고 지혜로운 사람.... 그게 너여야 해. 무조건 일등하는 인생은 바라지 않는단다. 더러는 꼴찌도 해 보고 이등도 해 보고 물론 일등도 해 보아야겠지? 일등이 된다 하더라도 겸손할줄 알면 되고 꼴찌를 하더라도 가슴속 가득 사랑과 지혜가 넘쳐나면 되는 거지. 유진이가 네돌이 지난 지금, 가장 신경쓰고 있는 부분은 다양한 체험들을 접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다양한 체험들을 통해서 지식을 확장해 나가고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려 노력한단다. 엄마의 노력만큼 유진이도 잘 적응해 주어서 너무나도 고맙기 그지없고.... 엄마가 유진이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는 소망은 유진이의 이름자처럼 살아가는 것이란다.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독립심 강하고 자립심이 강하며 어느 곳엘 가더라도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단다. 지금 새벽 3시 54분이다. 몇시간째 이 글을 쓰노라니 팔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해지네. 요즘 몸이 많이 힘들어서 한의원엘 다니지. 피 빼고 침 맞고 한약까지 먹고 있다. 몸의 기가 다 빠지고 없는 상태라 기를 보충해야 한다고 무리하지 말고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하시던데..... 좀 무리는 했지만 이렇게 하고픈 말들 남기니 마음이 가뿐하다. 아까 저녁때 유진이는 컴퓨터 좀 하게 해 달라고 조르다가, 책 좀 읽어 달라고 조르다가.... 끝내는 삐져서 침대에 가서 잔다. 유진아~ 미안해. 네가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엄만 이 글 쓰느라 밤을 꼬박 샜다는 걸 네가 몇살쯤 되어야 몸소 느낄까....? 행복한 꿈 꿔~~~ 2003년 9월 23일 화요일 새벽 4시 정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