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머리에 두눈이 초롱하던 소녀와, 단발에 말수가 지독히 적은 소녀의 친구가 있었다.
긴머리소녀는 많은 친구가 있었꼬, 바쁘고 분주하고 명랑했다.
소녀의 친구는 늘 소녀를 기다려야했다. 소녀의 그늘에 쌓여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교정의 줄장미가 만개할때 그 줄장미 그늘에서 흙장난을 하며 몇시간씩 소녀를 기다렸다.
긴머리 소녀는 그녀에게 일찌감치 기다림이란 걸 가르쳐 주었다.
몇시간을 기다리다가 소녀가 나타나면,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일어나 손을 잡았다. 화를 낼줄도 몰랐다.
그리고, 해저문 운동장을 타닥타닥 말없이 건너가 51번 버스 뒷자리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수다스럽게 소녀가 말을 하면 그녀는 그런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간간 웃어줄 줄만 알았다.
소녀는 늘 타인의 시선을 모았고, 그녀는 소녀의 뒤에서 늘 희미했다.
그래도 그녀는 긴머리 소녀를 좋아했다.
예쁜걸 예쁘다고 말하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하고, 화가나면 화를 낼 줄 알고, 기쁘면 깔깔 웃을줄 아는 그녀를 부러워했다.
소녀의 웃음을 좋아했고, 까맣고 긴 머리를 좋아했고, 한껏 기교부린 그녀의 시를 좋아했으며, 그녀와 함께 가면 만나지는 글쟁이들과의 우연한 만남을 좋아했다.
단풍이 쌓인 벤취에 앉으면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녀는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느끼기만 할뿐 표현하는 일에 서툴렀고, 늘 긴머리소녀는 그녀의 느낌을 대신 정확하게 말해주어서 편했다.
그때 그녀에겐 속마음을, 자기의 주장을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웠던지..
소녀는 그녀에게 수많은 쪽지며 편지글을 쥐어주었다.
그녀는 채곡채곡 그 글들을 모았고, 보물처럼 간직했다.
긴머리 소녀가 너무나 좋아하던 문학모임 남학생이 있었다.
소녀는 그 애의 집을 찾기위해 주소하나 달랑 들고 발이 부르트도록 어느동네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열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때도 그녀는 소녀의 뒤에서 말없이 함께 있어 주었다.
학년이 바뀌었고, 그녀에게도 새 친구가 생겼다.
그녀의 새친구는 그녀와 많이 닮았었다. 성격도 생김새도... 그래서 그녀는 새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독서실에서 공부도 했고, 밤도 함께 세웠으며 여행도 했고, 차도 마셨다.
가끔 긴머리 소녀를 복도에서 만나면, 손을 흔들고 참하게 웃어주었다.
건망증이 심해서 책이며, 체육복을 곧잘 빌려가곤 하던 긴머리소녀는 되돌려줄때도 예쁘고 멋부린 글씨로 쪽지글을 끼워주곤 했었다.
그렇게 소녀와 그녀는 조금씩 멀어졌고, 둘이는 졸업을 했다.
각기 다른길을 가면서 소녀와 그녀는 조금씩 연락이 줄어들었다.
이제 그녀도 소녀처럼 예쁜 건 예쁘다고 말하고, 좋은건 좋다고 말하고 갖고싶은건 갖고싶다고 말하는 법을 배웠다.
줄장미가 만개하는 계절이 오면, 창문너머로 그녀는 소녀의 얼굴을 그린다.
깔깔깔 숨이넘어갈듯 호들갑스레 웃어젖히던 소녀의 웃음이 너무나 그립다.
소녀는 지금쯤 ㄴ낯선도시에서 열정적인 삶을 살 것이다.
그녀에게 소녀의 옛집 전화번호는 늘 선명하지만, 왜인지 그녀는 선뜻 전화를 걸지않는다.
마냥 가슴으로 그리워만 할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