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를 하려고 머리에 수건을 말았는데 떼르릉 ~~~ 울리는 전화벨. 몇시인가. 11시30분. 남편 때문에 며칠 전 거금 100만원의 술값을 물게 된 남편의 친구인가. 가슴이 철렁했다. 남편도 잠을 청하다 눈을 번쩍 떴다.
"저, 택배 아저씬데요. 109동 206호죠? 지금 가도 돼죠?"
이 야심한 밤에 무슨 택배? 기다리던 물건 준다는데 화낼 수도 없고 하여 오시라고 했다.
잠 달아난 남편이 담배를 사다달라고 하길래 택배가 오기 전에 갔다올까 오고 난 뒤에 갔다 올까 망설이다가 담배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택배를 받아오면 직업정신 투철한 아저씨 몇 걸음 덜 걷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과연 내 생각대로 되어 아저씨는 물건을 건네주며 고마워하였다. 운전석 옆좌석에 수북히 쌓여있는 물건을 보며 왜 이리 늦은 시간까지 다니시냐고 하니 일이 많아서 그렇단다.
물건을 건네받으며 "직업정신이 투철하시네요." 웅얼거렸는데 아저씨 들었는지 모르겠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쌩~~ 하니 달려간다.
여성들만 바글바글 모여 글을 올리는 한 사이트에 청일점 한 분이 있다. 일전에 그 분이 노래방 도우미의 투철한 직업정신에 대한 글을 올렸다가 회원들의 강한 반발과 지탄을 받았는데 노래목록의 번호 줄줄이 꿰는 노래방 도우미 못지 않게 택배 아저씨의 직업정신 또한 대단! ^^
쌩~ 하니 사라져가는 택배 차를 보며 나는 갑자기 내 자신이 달팸이가 된 기분이었다. 밤 늦게까지 총알처럼 쌩~~ 쌩~~ 달려야 살아남는 세상이다.
오늘 아침 라디오를 들으니 "슬로우 푸드(food)"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슬포우 푸드 운동은 식생활 개선 운동이라기 보다는 생활 철학 운동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마냥 노상 슬로우~~ 슬로우~~~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간다. 그렇다고해서 이제 스스로 속 터져 하지도 않는다.
단지 느림을 위장한 게으름을 스스로 경계해야 겠다는 생각을 택배 아저씨 덕분에 이 아침에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