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임시공휴일 어느 날이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96

소주 사먹지 말고, 까까 사 먹어


BY 여디디아 2003-09-18

수련회를 앞둔 아이의 낌새가 이상했다. 흥분한 몸짓으로 엄마 엄마를 연발하기에, 아이의 말을 귀 담아 들었다. 반아이가 "누님, 쥬스 한병 가져갈까요?" 하고 물었다는 얘기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않았다. 스리슬적 자나가 듯 물어봤다.  "얘, 엄만 구세대라 우리 예나를 따라가지도 못하겠다~앙,  뭔 말이냐~엉?"  신이 난 아이가 들떠서 하는 말, 누님은 자기를 가리키는 호칭이고 쥬스는 술이란다. 샌님에게 들킬까 쥬스병에 감춘다나?...

 그때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됐다. 수련회 가서 말썽이 안나려면 호기심을 풀어주는게 급선무가 아닐까. 온 가족이 외식을 하기로 했다. 일찍 퇴근한 남편의 투덜거림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리철판구이에 소주를 시키니, 아이는 주저하지 않고 단숨에 마신다. 허~할아버지가 놀래면서도 기특해한다, 어느새 이렇게 컸냐는 말씀을 하시더니 한 잔 더 따라주셨다. 우쭐해진 아이의 발그레한 얼굴이 철판에서 구워지는 야채같고, 아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철판에서 오그러지는 오리고기 같았다. 아이는 생맥주도 먹어보고 싶단다. 내친김에 숯불구이치킨 집에 갔다. 얼려진 큰 컵에 담진 차가운 맥주가 초봄의 날씨보다 더 차가웠다. 원샷, 하며 들이키는 아이는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 쫑알거렸다. 서슴없이 마시는 아이의 모습에 아빠의 울그락 불그락했지만 막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 온 아이가 자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닌채로, 몽글몽글하다.  방바닥이 붕 드는 것 같다는 말을 간신히 알아들었다. 그렇다. 중1자리 내 아이가 술에 취한 것이다. 아이는 그대로 잠 들었지만 나는 꼴딱 밤을 지샜다. 늦은 저녁, 카페인이 들은 차를 마신 것처럼 머리는 맑았다.

  우리 집안은 술이 센 편이다. 하지만 그건 저주의 신호였다. 내 조부는 일제시대 신문기자를 지낸 인테리였지만, 알콜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 아버지는 술에 절은 장기로 인해 위가 천공되어 대수술을 하고, 그 휴유증인지 파킨스와 알츠하이머 선고를 받았다. 물론 술은 한방울도 금기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곤 친정아버지와 살고 있는 나는 그 병수발을 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있어 술은 지긋지긋한 웬쑤 ,그 자체였다. 어려서부터 술로 인한 피해와 때론 폭력까지 체험한 나는, 결혼을 앞두고 술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을 배우자의 우선순위로 두었다.  그 응답으로 남편은 어쩔수 없는 회사 일과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빼고는 술을 자제하는 편이다.  집안 대소사 외에는 집에서도 술을 거의 먹지 않는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 간 아이가 술을 먹고 싶어 한다.  냄새도 싫다던 아이가...  아빠 완전히 술 끊게 해주세요, 하며 기도하던 아이가... 무엇이 이 아이를 달뜨게했을까? 중학생만 되어도 세상 유혹이 있는 것인가!  목숨 걸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수 많은 간구를 하며 애를 태운 적도 많치만, 내 진정 아이의 술 문제에 부딪칠 줄 몰랐노라~~

 허옇게 새벽은 오는데 혼돈스런 머릿속은 정리가 되지 않는다 . 핏줄은 못 속인다는 말이 이런 경우일까? 내가 넘 오버하나? 내 아이인줄 알았더니 어느새 거리를 둔 객체의 모습으로 다가온 아이... 잠든 아이가 새벽에 화장살을 들락거린다. 설사를 하며 복통을 호소한다.

 수련회 가는 날 아침, 산책 나가시던 아버지가  아이에게 용돈을 주셨다. 그러시면서 한마디, "예나야  소주 사먹지 말구...저 있잖니 그거, 그래 까~까 사 먹거라 응?"   !!!   컸다고 대견해하며 술을 따라주던 아버지도 어지간히 염려가 됐던 모양이다. 아이를 보내는 준비를 도우면서 조마조마했던 내 맘도 한숨 내려 앉는다.

 아이가 떠난 며칠동안 나는 새벽기도를 다녔다. 떨리는 속내를 감추며, 호기심을 풀어주었던 가족과의 외식, 그 의미와 그 의도를 아이가 감지해내기를...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과 구분되어 사는 어려운 이치를 아이가 알아가기를... 대학에 들어가서야 술과 마주쳤던 내 세대와 너무나 다른 아이의 세대를 넓은 시야로 관조할 수 있기를... 내 품을 떠난 아이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가슴은 차가와지기를...

  열네살의 아이와 마흔의 엄마가  술로 마주친 세상이 빙글빙글 어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