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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을 좋아한다


BY 개망초꽃 2003-09-17

오래된 것들을 좋아한다.

가구도 책도 일기장도 추억도 오래 될수록 정이간다.

우리집엔 옛가구가 있다.
시집 올 때 해 온 장농도 떡살무늬가 들어간 고가구를 골랐다.
여기에 책장을 맞췄고,
지금은 돌단풍이 앉아 있는 팔각의 둥글고 작은 장식장을 덤으로 샀다.
십년전엔 통나무로 엮은 나무의자 두개를 고가구 가게에서 사들였고,
몇년전엔 중고 소여물통을 또 장만했다.
애들아빠는 뭐 이런 걸 또 샀냐며 군시렁거리며 앞베란다에 놓아 주었다.
틈틈히 먼지가 낀 질박하고 투박한 소여물통을
물걸레로 깨끗이 닦고 마른걸레로 윤기를 냈다.
그 위에 유리를 덮고 작은 화분들을 나란히 놓았다.
소여물통 위에서 햇살을 먹으며 수돗물을 마시며
잘 자라고 있는 초록잎들을 볼 때마다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부자가 된 듯하다.

시집올 때 해 온 장농은 이젠 낡아질대로 낡아져
장농문이 짝이 맞지 않아 항상"열려 있어요"하는 폼으로 서있다.
정농속도 쓸모없이 생겨 이불장 가운데 선반 하나만 덜컥 있어서
이불을 넣었다가 꺼내려면 이불들을 한바탕 들쑤셔야만 한다.
옷장엔 옷걸이 봉 하나만 달랑 매달려 있어서
옷만 걸어둘 수 있지 티나 바지를 보기좋게 넣을 수가 없다.

요즘 나온 장농을 보면
아기자기 이쁜 수납장이 있고, 편리하게 칸칸이 나눠져 있다.
티나 바지를 색색이 넣어 두고 싶어서 새 장농을 사고 싶은 마음이 하늘같았다.
그러나 난 아직도 떡살무늬가 떡떡 찍힌 오래된 장농을 안방에 놓고선
슬플댄 같이 한숨은 쉬고, 아플 땐 같이 누워서 마주보고,
우울한 아침이면 같이 깨어나곤 한다.

팔각의 둥근 장식장엔 돌단풍이 몇년째 싱그럽게 자라고 있는데
꽃을 피우지 못하는 쪼끔 모자라는 돌단풍이다.
주인을 닮아 혼자라서 그런가보다.
통나무 의자 하나엔 16년이나 된 다이알식 전화기가 잘 늙어 가고 ,
두번째 통나무 의자엔 나무로 만든 작은 상자가 화장품을 그득 안고
"나도 고가구와 어울리지요?"한다.
앉아 있는 폼이 꼭 캥거루 엄마를 닮았다.

흙으로 지은 집에서 살고 싶다.
들꽃을 한아름 꽂은 항아리를 창밖을 바라보게 하고,
볏짚으로 지붕을 얹은 지붕도 갖고 싶다.
집안엔 고가구를 놓고 창문을 한지로 붙여 햇살을 엷게 받아 들이고,
앞마당엔 입이 커다란 항아리나 이가 빠진 돌절구통에 빗물을 받아
하늘과 구름들이 그 위에 마음대로 지나가도록 할 것이다.
통나무를 투닥투닥 박아서 의자와 탁자를 만들어
그 곳에 같은 추억을 간직한 오래된 사람들과

꽃도 한번보고 하늘도 한번보고......그러고 싶다.
혼자 있을 때 산문이나 시를 쓰면 아주 좋은 글이 나올 것 같다.

두 눈을 뜨면 꿈은 깨어나지만
헛된 꿈은 접어야 한다지만
내 마음엔 항상 앙금처럼 이런 꿈들이 가라앉아 있다.
나무가지로 휘휘 젓거나 손으로 밑바닥을 훑으면
내 꿈은 다시 살아나 허옇게 유영을 한다.

내일은 개여뀌꽃을 한웅큼 꺽어서 유리컵에 꽃아야겠다.
그리고 창이 환히 보이는 식탁에 놓아야겠다.
오래되어 의자천이 너덜거리는 식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