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핑계
이틀동안 얼마나 정신없이 바빴는지 이곳에 들어오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짬이 전혀 안났어요.
바쁠 수 있다는 것이 한편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주부의 바쁨은 곧 육체적으로 고달픔과 연결되는 것이기에 체력이 좀 떨어진 느낌이랍니다.
'어머님, 저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저녁에 연극보러 가야거든요...'
'그래? 그럼 어여 다녀와라. 넌 연극같은 거 참 좋아하더라.'
밤늦게 외출해야 하는 저는 서둘러 식사를 준비해드리고는 부랴부랴 지하철을 탔어요.
주부는 외출하려면 미리미리 일을 해 놓고 나가야 하니깐 얼마나 정신없고 바쁜지....
시어머님의 시원시원한 말씀이 늦은 시각에 외출하는 제 발걸음을 더 가볍게 했지요.
고등학교 동창들 만난 장소는 예술의 전당.
늦은 저녁 8시에 시작하는 풍류극 '나비의 꿈'은 경기고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화동연후회에서 창작극으로 만든 작품인데, 유병하신 황병기님이 음악감독을 하셨고,백남준님이 비디오아트를 담당하셔서 무대위에서 이루어진 예술성은 우리가 쉽게 접할 있는 어떤 것과는 사뭇 달랐어요.
살면서 이것이 꿈이었으면 하는, 꿈을 꾸면서 이것이 진짜였으면
하는 마음...
혹은 한 평생을 살다 눈감으니 마치 한바탕 어지러운 꿈과 같다는 구운몽의 마직막 글귀같은....
그런 굵직한 주제가 계속 맘에 남는 작품이었어요.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내가 꿈에 莊周(장주)가 된 것인가?'
인생지사 한바탕 꿈과 같은 거....
그런가요?
귀로 소리를 듣지 말고 마음과 지식으로 소리를 분별하지도 말며 진리로 소리를 듣고 이해하라는 장자의 心齊...
멋진 삶과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선인들이 부럽기만 해요.
2. 친정동생
4살박이 귀여운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정여동생이 난소에 작은 혹이 생겨서 병원에서 여러가지 검사를 받았어요.
나이가 얼마먹지 않았는데 그런 부인병이 생기다니 속이 많이 상했지요. 몸도 좀 약한 편인데....
같이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마취가 깨어나 몸이 회복되는 몇 시간을 기다렸지요.
병원 복도에는 같은 종류의 병으로 같이 검사를 받으러 들어간 환자를 기다리는 보호자들이 몇몇 있었답니다. 전 친정엄마와 긴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부인을 데리고 검사차 올라오셨다는 초로의 남자분이 눈에 띄었어요.
'아저씨는 누가 저 안에 들어갔어요?'
'예. 부인이 좀...'
부인은 자궁쪽 말고도 뇌에도 좋지않은 듯이 짐작되는 종양이 있으시다고 하시는데, '보호자 되시는 분!!'하는 호출이 있으실 때까지 어찌나 초조하게 계시는 지 옆에서 지켜보던 우리들도 같이 걱정을 하였지요.
예전엔 한 번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아서 굉장히 놀란 적도 있으시다고 하시더군요.
어쨌든지 병원이란 데는 가급적 가까이 않는 것이 좋아요.
오전 8시에 시작된 검사가 끝나고 마취가 깨고, 다시 회복이 될 때는 오후 2시경이었는데, 병원 앞에 있는 약국에 나가 약을 사서 돌아오니 동생은 이미 옷을 입고 대기실에 있는 의자에 쓰러져 있다시피 엎드려 있더군요.
'언니...., 엄마.....'
동생의 입술은 하얗게 변해있었어요.
검사를 마치고 회복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금방 조잘조잘 얘기도 잘 하건만 몸약한 제 동생은 중환자같더라구요.
'나온지 오래 된거야?'
'너무 아파.....'
닭똥같이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동생을 위로해 주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친정엄마.
허망할 정도로 약한 엄마는 아파하는 딸을 등에 기대게 하여 엘리베이터에 오르셨지요.
친정집에 돌아와 몇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어 있는 동생에게 잘 쉬라는 얘기를 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지요.
동생이 아픈 것을 아시는 저희 시어머님은
'얼마나 아팠다냐? 그래 병원에서는 어떻게 하라고 하든?..'
하시며 동생일에 걱정을 많이 해 주셨지만,어머님께 죄송했어요.
시댁쪽 일은 하면서도 늘 당당하고, 친정쪽 일은 하면서도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괜히 죄송하고 미안한 느낌이 드는걸까요?
외출하고 돌아오니 저녁 반찬도 별거 없었건만 갑자기 사촌형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들르신다고 하시잖아요.
부랴부랴 상을 봤는데 이웃집에서 가져다 준 맛난 반찬이 한두가지가 있었고, 또 낮에 친정엄마가 챙겨주신 오이소백이 김치에 멸치볶음을 놓으니 상이 푸짐해 보였어요.
엄마가 없어도 자기 할일들 잘 해 놓는 두 아들과 제게 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는 시어머님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죠.
그렇죠. 또 제가 하는 일이라면 맘을 푹 놓아주는 잘 생긴(?) 남편까지....
인생은 한 바탕 꿈일까요?
아직도 제 머리엔 어지러운 나비들이 한 가득 날아나니는 느낌이랍니다.
건강하게 지내세요...
병원에 가보니 절감하겠더라구여.
진짜 건강이 최고예요.
동생의 빠른 회복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