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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얼굴


BY 해일 2003-09-06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이번에 수술을 안하면 영영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의사가 말했다.

엄마 얼굴이 금방 소나기라도 내릴 듯 흐려진다.

별 거 아니라고, 마취하는데 뭘 알겠냐고 겁 먹은 엄마를 위로했다.

알았다고 하면서도 어쩔수 없이 초조해 하는 눈빛을 보는 건 차라리 고통이었다.

 

푹 자두라고 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잠이 올리 만무다.

아무리 그래도 수술 전날인데 곁에 있어주는 게 좋을 듯 싶어 겉 옷을 걸쳤다.

서늘한 새벽 바람을 맞으며 병원에 도착하니 그 어둑하고 기다란 복도 한 가운데

엄마가 앉아 있었다.

...겁쟁이.

 

내 기억속의 엄마는 늘 씩씩한 사람이었다.

내가 군에 갈 때도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잘 갔다와'가

전부였다. 빡빡 머리로 논산을 향해 가면서 친척들까지 요란법석하게 따라오는

사람들이 부러웠을 만큼.

웬만한 아픔은 끄떡도 안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철의 여인이 그 어둑한 복도 구석에서 떨고 있는 걸 보니 울컥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형을 군에 보내놓고 엄마는 조석으로 따뜻한 밥을 퍼 놓고는 했다.

먹을 사람도 없는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이렇게 해야 객지 나가서

배를 곯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날 밤인가... 누군가 서럽게 훌쩍이는 소리에 잠을 깼다.

그제야 엄마가 매일 밤 저렇게 소리 죽여 울었다는 걸 알았다.

 

병실에서 조차 자식 걱정, 내리는 비를 보며 농사 걱정을 하는 엄마에게

버럭 짜증을 냈다. 청승 그만 떨고 잠이나 자라고...

애써 잠든 척 했지만 나는 안다.

엄마가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는 걸.

그 밤, 엄마는 혼잣말처럼 십년만 더 살고 싶다고 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엄마에게 잘 받고 오세요 했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희미하게 웃어준다.

애써 강한 척 하는 엄마를 보는 게 딱해서 수술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엉엉 울어 버렸다.

때로는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 슬픔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차가운 수술실에 엄마를 놔두고 돌아서면서 지랄스럽게 떨고있는 나를 보았다.

빌어먹을...

겁쟁인 엄마가 아니라 나였다.

 

열 한 시간에 걸친 대수술.

무너진 척추뼈를 다시 세우는 일은 의사의 말처럼 어려운 일인듯 했다.

내 온몸의 피가 타들어 가는 동안 엄마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거닐었을까.

수술 현황판에 새겨진 엄마 이름은 밤이 이슥토록 지워질 줄을 몰랐다.

나를 보고 웃던 희미한 얼굴이 대못이 되어 가슴을 후비고 있었다.

엄마를 저 곳으로 몰아간 범인은 내가 아닐런지.

 

자식은 부모 앞에 늘 죄인이다.

영원히 면제 받지 못할 무기수.

 

중환자실로 옮겨진 엄마의 얼굴은 풍선처럼 퉁퉁 부어 낯설기까지 했다.

눈도 못뜨는 채로 아프다는 말만 반복해서 했다.

엄마는 더이상 소리 죽여 울지도 못할 만큼 늙고 지쳐있었다.

그런데도 난 아프다는 말조차 너무 고마웠다.

엄마가 다시 살아 돌아왔으므로.

 

나에겐 보고 있어도 자꾸만 보고 싶은 얼굴이 있다.

늘 함께 있어도 그리운 얼굴...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