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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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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나긴 오후 *


BY 쟈스민 2002-03-13

햇살의 살랑거림이 경쾌하고, 하늘이 무척 맑은 오후
그렇지만 오늘은 왠지 그 오후의 시간들이 길고 지루한 시간이 되어
나에게로 다가선다.

점심시간을 지나 오후 1시가 넘어가고 있을 무렵
아직은 학교급식을 실시하지 않은 탓에
아침나절 엄마가 준비하여 둔 메뉴로 손수 점심을 챙겨 먹고 있을 아이들에게
전화를 건다.

"학교에 잘 다녀왔느냐, 집엔 별일 없느냐" 의례적인 일을 묻고,
어서 점심 먹으라고 시간체크를 해 준다.

새내기인 1학년 동생을 3학년 언니가 엄마대신 보살펴야 하는 상황
안 봐도 훤할 만큼 아이들만 있는 공간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만치 침착하고 차분하게 알아서 점심 챙겨 먹고,
시간되면 학원에 가는 아이들이 마냥 대견스럽기만 했는데 ...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집에서 전화가 왔다고
옆자리의 직원이 전하여 준다.

무슨일일까? 내심 궁금해 하며 얼른 전화기로 손이 간다.

3학년 큰 딸아이의 목소리에는 뭔가 급박한 일이 일어난 듯
"엄마 큰 일 났어 ... " 그러는 거다.
"왜 무슨일인데?" 화들짝 놀라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나

평소 화초를 좋아하는 나는
실내분위기를 좋게 하는데도 도움을 주고, 전자파 흡수도 해 준다고 하기에
내 딴에는 좀 과용을 하여 맞아 들인 키 큰 폴리셔츠라고 하는
나무 한그루를 거실 한켠에 놓아두고서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이가 그 나무에 기대어 서면서 아마도 물받이 옆으로 기우뚱했는데
중심을 잃고 서 있던 화분이 바닥으로 쓰러졌나보다.
세상에나... 내가 못살아...

워낙에 키가 큰 식물이라 아이들 힘으로 일으키지도 못하고
화분은 이미 깨어진 상태이며, 흙이 여기 저기 넓브러져 뒤죽박죽이라고 ...
딸아이의 보고내용은 그러했다.

난 깜짝놀래서 화분에 기대었던 동생은 괜찮으냐고 안부를 물었지만
그동안 얼마나 애지중지 기른 나무였는데 ...
난 잠시 허탈해서 멍하니 앉아 있을수 밖에 없었다.

급한 마음에 화원에 전화를 걸었더니
내일이 화이트 데이라서 바쁘다며 토요일에나 다시 심어주겠노라고 한다.

난리법석으로 어질러진 거실 풍경이 눈에 선하면서도
그 몇시간 일찍을 집에 돌아갈 수 없는 내가
새삼 한곳에 매인 몸이라는 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정말 그만하길 다행이지 애라도 다쳤으면 어쩔 뻔 했어?

극성맞은 아이를 다그치며 "저녁에 혼날줄 알아 ... 응?"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아이가 무사한 것으로 철렁했던 가슴을
조금씩 제 자리에 돌려 놓아야만 했다.

오늘 저녁엔 집에 가면
실내에 혹 아이들이 다칠만한 물건을 아무 생각없이 놓아두진 않았는지
다시한번 꼼꼼히 살펴보아야겠다.

그런데 오늘 오후 시간은 왜 이리도 더디게만 가는 걸까?

마음은 벌써 집으로 달려가고도 남았는데
나는 아직도 여기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살다보니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난다.

"멀쩡하던 화분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말하던 아이의 겁에 질린 얼굴이
눈에 선하여 오후 내내 마음이 아프다.

아이들을 위하여서라면
아직은 내가 집에 있어야 할 때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거야?
어서 집에 가봐야지 ...
누가 나를 막 채근하듯 마음만 조급해서 일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과연 어느곳인지
해답없는 질문만을 그렇게 쏟아붓고 있었다.

오늘처럼 오후가 길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처음이지 싶다.

넘어진 나무를 일으켜 세우고, 깨진 화분을 다시금 주워 챙겨
새로 화분을 구하여 다시 심으면 그만일테지만

나는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아이들만 놓아두고 나의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가슴졸여 하며 살아야 하는건지

일을 하는 엄마가 제대로 엄마노릇을 하며 살기란
얼마나 힘에 부치며, 버거운 일이던가
내게 주어진 그외에도 너무 많은걸 바라며 살고 있진 않았는지

마음속에 이는 작은 풍랑을 주체할수 없는
그런 오후를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