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75

이상형 좀 바꾸면 안될까예?


BY 하얀 조가비 2003-08-10

달빛이 교교한 당산나무 아래서
남학생과 마주했습니다
며칠을 연습했던 말들을
차근 차근 해야겠기에
마주하고 서있는데
전날 밤까지 연습했던
대사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교모를 눌러쓴 남학생은
많이 궁금한지
어서빨리 말 을 해보란 듯이
재촉하는 빛이 역력한데
입 은 자물쇠를 채운것 마냥
열리지를 않습니다
곁에선 새우개 사는 친구 경란이가
옆구리를 찌르지 않았다면
달이 다 지도록 말한마디
건네지도 못했겠지만
아무말 못하고
발부리로 애꿎은 돌멩이만
거둬차는 내가 보기 딱했던지
친구 경란이의 느닷없는
옆구리 찌르기에
엉겹결에
내입에서 쏟아진 말 은
너무나 부끄러운 대사였습니다

'우짜다가 지가 이상형이 되어슬까예,그만
그 이상형을 좀 바꾸면 안될까예?'


여중 삼학년때였습니다
당시
앙케이트랍시고 남학교서 여학교로
여학교서 남학교로
대학노트 한권에다
자신의 프로필을 적고
설문내용이라야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은
생년월일,이름,취미,특기,좋아하는 계절,좋아하는 음악,
나의 이상형,......
등등의 씨잘데기 없는 내용으로
도대체 그딴걸 물어서
뭘 할지도 모르면서
재미삼아 유행처럼
괜히 동네 여학생 혹은 남학생을 통해서
이 학교 ,저 학교 , 나돌고 있었는데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서
몆 번 낙서 겸해서 써준적이 꽤 있었습니다
새우개 사는 경란이네 동네는
봄이면 지천으로 배꽃이 만발하여
우리들 뭇가슴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으므로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경란이네 집으로 가서
마을어귀에서 부터
경란이네 뒷산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수다 떨기도 하면서
짧은 봄날을 지냈답니다
그날도 토요일이라
친구 다섯명이 경란이 집 마루에서
막 앙케이트 공책 한권 끄집어 내서
킥킥 거리며 앞에 설문에 응한 학생들것
들쳐보며 웃고 있는데
대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교모쓴 남학생이 쑥 들어왔지요
우리도 놀랬지만
그 남학생도 꽤 당황했던지
경란이에게 노트한권을 건네며
'이것좀 친구들에게 적어달래봐'
이러고는 대문께로 허겁지겁 달려갔습니다
남학생이 두고간 공책은
예의 그 앙케이트였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내 친구 영자가
쿠피트의 화살에 상처를 입게 될줄이야 ~!!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남학생이 쏜 화살이 아니라
지가 그 남학생 가슴에다 쏜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날이후
경란이 를 은근히 조르기도 하고
쪽지를 건네주면서 전해달라기도 하고
영자는 점점 사랑의 열병에
푹 빠져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새우개 나들이가 잦아졌습니다
영자 가 자꾸 그 남학생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가자고 하니
안갈수도 없었지요
봄부터 시작한 영자 의 줄달리기는
여름 내내 이어졌습니다
변변히 남학생과 만나서
얘기 한번 못해본것 같은데도
영자 의 짝사랑은 깊어만 갔습니다
친구라지만 도움을 줄수없어
우리들은 애 를 태웠지요


그런 어느날 아침
막 등교를 해서 책가방을 놓고
걸상에 앉아있자니
경란이가 눈짓을 하며 따라 나오라 했습니다
이층 난간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사각으로 접혀진 편지 하나를 주더군요
무심코 펼쳐보다가
까무러칠뻔 했답니다

'이상형인 00, ....'
이렇게 시작된 편지였는데
가슴이 떨려와서
도저히 더 읽어볼수가 없었습니다
경란이 랑 고개를 맞대고
이일을 어떻게 하냐고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현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왜? 하필 내가 지 이상형이고
속으로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도
솔직히 싫진 않았습니다
선머스마 같았던 나에게도
고민이 생겼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이기 아니다 ' 그 생각이 팍 들었습니다
남자만 의리가 있는게 아니다
영자 를 위해서 이럴수는 없다
하며
멋진 대사들을 준비했지요
결딴을 내야 했으므로
딴에는 상처받지 않게
말을 잘해야겠다고
그동안 뭇 소설속에서 봐왔던
명대사들을 참고하며
준비를 해서
나간것까지는 좋았습니다
분위기도 그럴듯했습니다
그날이 열사흘이었거든요
그런 분위기 속 에서
사랑고백을 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얄궂은 운명처럼
시작도 못해보고,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이상한 일에 말려 '끝내시요'
요말을 하러 나온 내처지가
서글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외워둔 그 명대사들이
도대체 한마디도 안나오지 뭡니까
속에서는 멋진 대사들이 꽉 들어차서
가슴이 답답할 지경인데도
입으로 뱉어내야 말 이될터인데도
말이 나와야지요
우물 쭈물하자니
답답했던 경란이가 옆구리를 팍 찔렀고
동시에
놀란 내 가

저 위에 있는 명대사를 쏟아냈지 뭡니까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어집니다
어처구니없는 그 한마디 때문에
다시는 새우개 마을도,경란이 집도,
가보지 못하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가고
영자에게 다른 사랑이 찾아오고
우리들은 그 시절이 추억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운 저 대사가 아직도
얼굴 붉히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