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쉰둥이다. 쉰이 훨씬 넘어 날 나셨고,,
내가 결혼 하던해에 우리아버지의 연세가 80 이셨으니,-애석하게도
4달후에 소천 하셨지만- 난 다른 사람들의 손녀딸정도인 셈이다.
나의 어릴때 얘기가 나오면,
우리 아이들은 내가 아무래도 어디서 낳아온 애가 아니면 업둥이 일 것이라고 지금도 놀린다. 만주공주라는 별명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우리 아버님이 만주에 가 계신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날 데려 왔을꺼란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순전히 아이들 짐작이지만,....
내가 식두들과 안 닮았다는 것도 이유중에 하나다.
학교 다닐때,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아버지를 보고
"너네 할아버지시니?' 하고 묻곤했었다. 나는 그말이 듣기 싫어서 늘
젊은 아빠를 가진 친구들을 부러워 했었다.
한학자이고 훌륭한 분이셨지만, 넥타이를 매는 다른애들 아빠가 부러워
자고 나면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신사가 되어 있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건 도자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내가 큰성에서 살며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사는 공주가 되는
꿈을 꾸는것과, 함께 내 어린날의 소망 중에 하나였다.
학교 선생님을 아버지로 둔 친구네 놀러 갔다가 대문을 들어서자,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었는데, 난 그게 어찌나
부러웠던지, 그길로 집에 와서는 이불을 쓰고 울었던 기억이 있다.
다른 아이들 아빠는 다 저렇게 젊은데 왜 우리 아버지는 한복만 입으시고, 한문으로만 된 책을 읽으시는지.....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둔
내가 불행한것 같아 저녁 내내 슬펐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철이없고 어리석은 꼬맹이 계집애 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14년- 어머니는 생각보다 일찍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재혼을 하셔서도 잘 사셨다.
원래 우리어머닌 곱고 얌전한 천상 여자인 분이셨지만 왜일까? 56세의
나이로 쪼끄만 나를 두고 가셨다. 많은날을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새면서 새엄마를 맞은 아버질 원망 했었다.
난 그때 15세의 사춘기 나이였으니 아버지를, 그리고 부부문제를 이해
할 수가 없었고, 안방이 멀 정도로 커다란 오래된 집은 혼자있는 내
방이 쓸쓸하고 무서워서 혼자 울곤 했었다.
유식 하셨지만 늦게는 농사를 지으며 조용하게 사셨는데,
참으로 가리는게 많은 절제된 생활을 하셨다.
지금도 역역하게 기억이 나는것은 머리감는 날도 가려서 하셨다는
것이다. 역학에 거의 심취하셨는데, 본인에게 안좋다면 주위사람들의
장례식에도 절대로 안가셨다는 것이다. 집에 못 하나 박는데도 날을
잡아서 할 정도였다.
안방에서도 꼭 본인 앉는 자리에 앉으셔서 밥상을 받으시고, 그자리에
앉아 늘 책을 읽곤 하셨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집안 대소사를 상의 하러오고 결혼날짜나 이사
가는날을 택일하러 오곤해서, 우리집은 늘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한사람에게도 함부로 대하는법이 없이 친절하게 택일을 잡아주곤 했다
그게 소문이 나서 아주 먼곳에서 까지 사람들이 오곤 했었다.누구에게나
법 없이도 산다는 말을 듣는 어른 이셨다.
농사철이면 가까운 논에는
뒷짐을 지고 담뱃대를 손에들고, 새벽에 일어나 논을 둘러보러 가셨는데
다녀오셔서 아침을 드시곤 하셨다.
아버지 몸에서 느끼던 새벽의 서늘한 기온이 아침밥상에 느껴지곤했다
늦동이인 탓에 오빠들은 모두 결혼해 집을 떠나있고, 나만 학교에
다닐 때라서, 아버지와 받는 밥상은 늘 정갈하고 아버지의 놋으로된
밥주발은 권위의 상징 이었다.
식사를 잘 하셨는데, 아버지 밥 중간에는 노란 계란을 깨어 넣어서
어느만큼 드시면,
수저에 노란자가 묻어 나 오곤 했다.
아버지 건강을 챙기는 밥하는 분의 정성이었던것 같다. 뜨거운 밥속에서 나오던 계란의 노란빛깔이 늘 선명해서, 지금도 기억이 난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밥을 먹어야하고 음식먹는 소리를 크게
내면 않되고, 맛있는 음식만을 먹어도 않되고, 어른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면 않되고 하는 식사 규칙은 내겐 자연스러운것이었다.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잔소리를 해대면 아마도 밥을 안먹겠다고 할지도 모르지.....
학교에 다녀와도 늘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보는 모습을 보거나 화투를 가지고 패를 띠는 모습을 보는 때가 많았다.
내겐 각별한 애정을 주셔서 외출해서 돌아오실때 늘 손에는 나를 위한 간식이 들려 있곤 했다. 과일 이라던가, 사탕이라던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농사철이면 논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샛밥을 내갈때 아버지의 뒤를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따라 가거나, 다른 양념통 같은걸 들고 따라 가곤 했는데, 아버지 보다 걸음이 늦은 난, 가다가 주저앉아 주전자 꼭지로
막걸리를 꼴각꼴각 먹곤 했었다. 논에 도착해보면 내 얼굴이 발그래해서
" 막내야, 오면서 막걸리 먹었구나,"하면 너무 부끄러워서,
아니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잡아떼곤 했었다..
일찍이 혼자 술을 배운(?) 탓에 지금도 막걸리에 대한 향수가 있다.
헌데 난 지금 막걸리만 먹으면 속이 안 좋은지 모르겠다.
아마도 도시물이 들어버린 내몸이 예전의 내가 아닌 모양이다.
아버지에대한 기억은 나의 어린날의 향수와 거의 같은 선상에 있다.
상급학교에 오면서 아버지를 떠나 살았고,
가끔 뵙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나에겐 엄격하고, 어려운 존재였다.
그래도 어린날엔 입담이 좋으셨던 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로 긴밤을 보낸
기억도 있다. 언니와 끝도 없이 이어지던 옛날 얘기를 많이도 들었었는데, 그때의 얘기들이 나의 문학수업에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어쨌든 어릴때 부터 쓰고 읽는 일에 친근감이 있었으니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바로,
막내오빠가 서울로 대학을 가고 건넌방에 쌓였던 책속에서 두툼한 일기장을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영어와 한문을 반은섞어서 쓴 일기장은
나의 대단한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 했지만 도무지 읽을 수가 없어서
그걸 들고 아버지에게 안방으로 달려가면 아버지는
별 나무람없이, 그어려운 한문글씨를 읽어주곤 했다. 사실 엉터리로 꾸며 읽어주어도 내가 알 수도 없었겠지만.
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오빠들의 어려운 책을 읽는게 하루의 많은 시간을 차지 했었다. 아버지는 늘 뜻도 모르는 책을 붙잡고 있지말라는 얘긴 안하시고,
우리 막내 딸은 책을너무 좋아한다고 자랑삼아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자라고서도 책을 읽을 때마다 어디서 한번은 읽은듯 하게 느낀적이 많은데 아마도 제목이라도 보았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우리 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셨다.
술을 드실땐 원샷으로 한번에 다 마시는걸 좋아 하셨는데,
우리 남편을 처음으로 아버지께 소개하던 날도 법주를 대접에 따라 한번에 쭉~
드시는걸 보고 놀랐던 기억을 지금도 가끔 얘길 하곤 한다.
그래도 한번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본다거나 술이취해 주정을 한다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본적이 없다.
참 반듯하게 자기를 추수리는 어른이셨다.
식구들이 모두 반대 했지만 우리 그일 허락해주신분. 아버진 우리 그이가
손이 두툼하니 복이 들었다고 하셨다. 돈걱정은 안 시키겠다고 우리
결혼을 허락해 주셨다.
그는 그약속을 지키기 위함인지 이제까지 돈 걱정은 안 시키고 살았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맞은경우 중에 하나이다.
나는 섣달 생일이라서 베풀고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지금도 그말씀을
기억하며 살고 있다. 되도록 주위에 베풀며 살아야지....
큰 욕심없이 살으신 것처럼 돌아가실 때도 편하게 임종을 맞으셨다..
오남매를 전부 결혼을 시키고-늦둥이 막내 딸까지 짝을 맺어 줬으니-
외손주 까지 모두 지켜 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그분의 삶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평범한 삶이었지만
훌륭한 삶이었다.
가족들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욕심없이 사는법을 몸소 보여주시고
노년을 조용히, 부인을 사랑하며,
자식들에게 전혀 의지 안하고 지내시다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