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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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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떠난다는 것


BY 심향 2001-01-10

한동안 무력했다.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나무가 잎새를 떨구듯 겨울의 길목은 차고 메마르기만했다. 활기 넘친 오감은 할딱거리는 가슴속에서 차츰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한옥을 헐고 새집을 번듯하게 지어 놓았다. 넓은 마당엔 겨울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비로서 제빛을 맘껏 뽐내는 사철 푸르른 주목나무 울타리는 한낮이면 아기새들의 놀이터가 되주었다.
내 할아버님의 할아버님이 심어 놓은듯 아름드리 밤나무는 마당 입구에 자리잡고 새집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었고 텅빈마당 한가운데서 이리 저리 흐드러질대로 흐드러지는 오래된 감나무 가지의 자유분방함은 뒷산에서 독야청청 올곧게 자라는 소나무보다 웬지 더 애착이 가는 까닭을 나는 모르겠다.
얕으막한 뒷산을 오르는 오솔길 옆 작은 산죽과 이름모를 나무들은 새집의 후원이 되어 사계절의 운치를 아름답게 보여줄것이고...

바쁘게 살아온 한해를 마무리 할 즈음 시린 바람이 서서히 내 늑골 깊히 파고 들고 있었다.
억누를수 없는 허탈감은 이제 아무런 문제 없는 일상에서 내게 잠시 탈출을 유도케 했다.
충북선, 주말과 휴일에 단 두번 운행하는 영주행 밤열차에 몸을 실었다.
낯선곳을 향해 어둠속으로 미끄러지듯 레일위를 달리는 철마는 내게 깊은밤의 평온한 안식을 안겨 주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반겨주는이 없는 영주역 광장은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로 조금은 혼잡스럽다.
하룻밤 묵을 곳을 찾아 발길을 옮겼다. 너무 화려하지 않고 그렇다고 으슥하지 않은 역 근처에서 조금 떨어진 단촐한 여관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씨 좋게 생긴 젊은 아주머니는 조금도 의아해 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약간은 쑥스러울뿐...
"아줌마 혼자세요?" "네 작고 따뜻한 방좀 주세요"
긴 복도를 지나 맨끄트머리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노란이불과 희디흰 요가 가지런히 펼쳐있는 작은방은 너무나 따뜻하고 정갈했다.
불현듯 겨우내 군불을 때며 온돌방을 지펴온 고향집 엄마의 포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추위에 떤 몸을 요밑으로 집어 넣고 약간 불안했던 마음도 함께 녹여 주었다.
베낭속에서 하나 둘씩 꺼내지는 것들.
옷걸이에 두툼한 등산복을 걸어 놓고 한뭉큼의 약을 먹고 그리고 빗을 꺼내 며칠동안 감지 않던 머리를 욕실로 들어가 시원하게 감았다. 따뜻한 이불속에서 맑은 정신으로 한권의 책을 읽어 내려가니 참으로 호젓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평온한 밤이었다.
꿈결속에서 잠든 딸아이를 깨우며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6시.
낯선 곳에서 혼자 자는 엄마가 못 믿어워 꿈속까지 찾아와 밤새 지켜준 딸아이였던가.
갑자기 내 가족이 그립고 보고 싶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정한 엄마가 되어줄께...

삶이 무기력해질때 나는 가끔 산을 찾는다.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털모자를 쓰고 추위를 몹시 타는 나는 방한 준비를 완벽하게 하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녁 여관을 나섰다.
겨울! 가슴이 답답할때면 얼마나 고대했던가.
문밖을 나서니 흰눈이 펑펑 쏟아지고 도시는 온통 하얗게 덮혀 은빛세계로 변해있었다.
잠시 혼란스러웠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아무튼 택시를 잡아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눈은 이미 폭설로 변해 시외로 빠져나가는 버스들은 제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기사아저씨들은 체인을 감고 부산을 떠는데 날씨탓인지 승객들은 두세명뿐 등산복차림은 나뿐이였다.
낮게 내려앉은 재빛하늘에선 좀처럼 눈이 멎지 않을 기세다.
2시간 남짓 몇대의 차를 보낸 허틈한 대합실 안에선,
사람들의 근심 어린 얼굴이 무료한 시간을 속절없이 보내고 있었다.
몇몇이 낡은 3구 연탄 난로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열기를 쬐며 긴 나무의자에 둘러 앉아 떠나온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썰렁했던 대합실 풍경이 그나마 훈훈해 지고 있었다.

계절이 바뀔때마다,
어디론가 잠시 떠나고 싶을때마다,
허허로운 마음을 달랠길없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그려온 부석사를 지척에 두고 발길을 돌릴수는 없었다.
일단 버스에 올라탔다. 그 버스를 타고 다시 되돌아나올지라도.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산골풍경은 퍼붓는 폭설로 자취마저 희미하다.
다행인 것은 기온은 높아 차도는 내리는 눈들이 얼지 않고 녹아 질퍽거리고 있었다.
조심 조심 그래도 큰 무리없이 부석사에 도착한 설경은 나를 망연케 했다.
어디로 가야하나! 일행도 없는 산길을 누군가의 발자취따라 들어서려니 눈덮인 소백산 자락이 순간 두려움으로 다가선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을 밟으며 힘겹게 걸어 들어가고 있는 내시선은 도무지 어디에 고정시켜야 할지 감을 잡을수가 없었다.
그래,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그만 그리움을 삭이고 눈속에 갇힌 부석사를 오래도록 가슴 한켤에 묻어두자.

드센 바람에 굴하지 않던 몇잎의 은행잎은 설화에 치여 미련없이 흰산길위에 노랗게 흩뿌려진다.
은행나무였구나!.. 은행잎이 노랗게 진 늦가을의 정취가 가장 아름답다는 부석사이지만 계절과 무관하게 달려온 이유를 이제야 비로서 알것 같다. 뿌옇게 내리는 눈밭속에서 다가오는 일주문 진입로 설경을 어떻게 표현할수 있을까. 마음속에 담아올 뿐 방법이 없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천왕문으로 들어섰다. 두눈을 질끈 부릅뜬 사천왕의 시선은 나를 송두리째 헤집고 우악스런 발로 질끈 눌러버릴 기세다.
"살려 주세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천지간이 하얗고 내영혼이 하얗 답니다."
쫓기듯 천왕문을 벗어났다.
비탈진 산길에 돌축대와 돌계단은 흰눈에 가려 언뜻 내비칠뿐 자연스런 조화로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범종루, 요사채, 응향각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하얗게 덮고 꿈을 꾸듯 깊은 수면속으로 빠져들고,
봉황의 날갯짓 같다던 누각의 아름다운 모습도 오늘 하루는 잠시 날개를 접고 휴식은 취하는데 오랜 세월 숱하게 다녀간 시인 묵객들이 남긴 부석사의 예찬은 안양루 누대에 걸려 눈보라를 맞으며 오늘도 서서히 바래지고 있었다.
휘날리는 눈밭에 아스라한 태백준령의 장쾌함은 사라지고 삿갓시인 김립의 또렷한 시만이 부석사의 장대한 경관을 상상할뿐이다.

이 설산에 오직 한곳. 무량수전만이 홀연히 범접할수 없는 기상을 품고 천년세월의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16년(67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무량수전은 1043년 고려 정종9년 원융국사가 부석사를 중창할때 지은 창건연대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무량수전 앞마당에 세워진 아담한 석등은 국보 17호로 명작중의 명작이라는데 흰눈에 가려 단아한 기품을 발휘하지못한다.
하얗게 뒤집어쓴 눈을 털고 털모자를 벗고 베낭을 들고 심호흡을 한뒤 무량수전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광배 앞에서 극락을 주재한다는 아미타여래의 미소는 절한번 올리때마다 내게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아무도 없는 불당에서 삼배를 올리며 그동안 쌓인 속진을 말끔히 씻어버렸다.
부석사의 설화가 담긴 뜬 바위,
조촐한 선묘각안에는 의상을 위해 희생한 중국인 아가씨 선묘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에서 잎이 나왔다는 선비화는 조사당 마당에서 뿌리를 내리고 응진전으로 가는 산길은 작은 산죽이 삐죽삐죽 푸른빛을 비치며 나를 인도한다.
사람 발자국 하나없는 이 산속에서 헤매다 길을 잃고 눈속에 갇혀 버린다면 작은 암자 자인당에서 몇날 며칠을 묵고 싶다.

설해목, 산속에서 얼마든지 닥쳐올 일 우지직! 우지직! 눈가루가 하얗게 부서져 내몸을 덮친다.
굵은 소나무 가지가 눈부신 설화를 이기지 못하고 나를 비껴 꺽여지고 만다.
아미타여래의 보살핌인가. 놀란 가슴은 잠시 발걸음을 떼지 않고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가호에 조용히 감사드렸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도 곱게 겹쳐진 능선들은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는'
고 최순우선생의 글을 되뇌이며
산 중턱 삼층석탑에 홀로서서 백지로 변해버린 아스라한 능선을 하염없이 그려보았다.
일순간 한줄기 능선이 실낱처럼 드러난다.
금새 사라진 희미한 능선을 나는 놓칠수없다.
가슴속 깊이 새기며
오랫동안 품어온 그리움의 부석사를 이제 나는 하얗게 지워보련다.

고립된 듯한 곳에 흰옷을 입고 서 있는 유리벽속의 공중전화.
밤이 새도록 나와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K가 생각났다.
이곳의 산과 홀로 떠나온 나를 어떤 말로 전달할수 있을까.
막연해지는 이 심정을 너는 아마도 이해하리라.
그러나 먼훗날 K..
너는 청량리에서 나는 오근장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또 다른 계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