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의 추억을 봤습니다.
살인과 추억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단어의 결합에서 우리는 이미 이 영화의 수상한 정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살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버석거림, 차가움, 명징함에 비해, 추억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축축하고, 따뜻하고, 아련하게 모호한지요.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라는 카피가 무색하게 주인공들-경찰-에게 범인을 잡으려는 집요함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카피대로라면 영화는 오로지 범인이 누구냐, 그리하여 범인이 어떻게 잔인했고 어떻게 그를 잡아내고야 마느냐를 보여주는데 급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다면 이건 잘 짜여진 추리극이 되었을 테지요.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전혀 엉뚱한 용의자를 잡아다가 범인만들기를 하는 걸 보면서 이미 이것이 범인을 잡으려는 수사반장이나 형사콜롬보 같은 추리극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하나 뛰어나게 영웅적이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는 너무나 평범해서 화가 날 지경입니다.
그리고 끝내 영화는 누구도 영웅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미친 듯이 죄를 지은 자와 역시나 미치게 단죄하고 싶었던 자가 같은 포즈로 같은 장소를 들여다본다는 행위는 묘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았든 그들은 함께 동시대를 살았고, 같은 상황속에 있었고, 그리하여 '우리'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겟지요.
수미상관의 구조-?-를 맞추느라-시작부분에도 아이가 나온다- 끝부분에 등장한 아이가 말갛게 말하지요.
"어떻게 생겼지?"
"그냥... 평범해요...'
자...... 그 평범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주고 있는 수상한 정서입니다.
그렇게 살인이 일어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섹스를 하고, 그걸 배경으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또한 술을 마시고 토하거나, 라디오의 인기가요프로그램을 듣는 것입니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농촌 풍경 안에 끔찍한 살인의 나날들이 숨어 있듯이, 한없이 평범해 뵈는 우리 일상 속에는 그렇게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봐도 정황적으로 범인일 수밖에 없는 세 번째 용의자의 얼굴 역시 한없이 선량하고 연약해 보입니다. 그가 범인이든 아니든 그것은 역시나 묘하게 역설적입니다.
그 느낌은 살인과 추억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두 단어의 결합이 주는 울림과 비슷합니다.
그리하여 영화는 시종일관 그렇게 극단적인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우리가 믿고 있거나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들이 어떻게 불확실하고, 얼마나 수상한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 있습니다.
그들 모두 역할 속에 녹아들어 누구하나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입니다.
김상경을 제외하고-그는 지나치게 잘 생겼다!! 그래도 영화니까 관객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이었을까? 그런 의미로 보면 그것 역시 성공적이다. 그의 눈빛은 그야말로 추억처럼 서늘하게 빛난다!!- 캐릭터 하나하나는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입니다. 정말 시골마을 하나를 뚝 떼어다가 무대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어쨌거나 살인조차 추억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가 뭐라든 시간의 힘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 시간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이렇게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달려가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