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이라고 달력숫자가 빨갛게 그어져 있던날..
예전처럼 어리둥절한 물음으로 날 찾아온 남자가 있었다..
당당하고 뿌듯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난 심사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느린말투 내가 늘 부러웠던 하얀 얼굴.. 그리고 어쩐지 조금은
익숙해진 시간속에서 잊을뻔하면 찾아오는 남자가 있었다..
맘속에 품고 내 뱉은적 없어 늘 갑갑하고 지루한 남자가 이젠
맘을 열겠다고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려대기 시작했다..
'' 어.. 목소리 그대로네.. ''
빼곰히 무안하게 쳐다보는 눈빛이 어쩜 날 주눅들게 하기 충분
했기에 이유없는 손가락만 헤아리고 있었다..
난 해줄말도 없었고 해야 할말만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내 맘속에
구겨넣느라 정신없는 상황에서 빠져나오려 허덕이고 있었다..
'' 살아 있었구나.. 그대로 있었구나.. 근데 정말 너 맞니? ''
거기까지만 듣고 싶었다. 담에 할말은 내가 해줘야 하는데 그건
내게 공포처럼 껴안고 살아야할 일임에 틀림없었다..
아..
삼일절날 말도 안되는 독립선언이라도 해야하냐구..
왜 이런일이 준비도 안된 날 헐떡이게 달려나오게 했냐구..
누구처럼 죽지 않고 살아서 나타나준게 고맙다고 해야하냐구..
변한건 없었지만 또 날 잔인하게 죄어오는 남자땜에 그날 이후
어지럼증이 생겼다..
또렷하게 떠오르는 긴 기다림을 내가 다시 떠안고 살게 될까봐
바보스런 겁장이가 될것 같아서 머뭇머뭇하고 말았다..
예전처럼 알수없는 흔들림으로 날 흔들리게 하기엔 내가
그전처럼 냉랭한 바보가 아니라는걸 이 방황하는 남잔 알까?
방황을 끝내고 막 돌아온 남잔 아직 방황을 멈추지 않았다..
그 속에 내가 빠져서 허우적 거린다면 내가 우스워질꺼란
상상으로 잠깐의 어색한 시간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방황은 남자가 하는것으로 충분하니깐...
방황하는 남자한테 예전의 시간을 돌려주기엔 내가 너무 억울
했다.. 난 방황하는 여자가 아니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