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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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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과 마님


BY adika 2003-06-29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더니 냉장고를 열고 기웃거린다. 뭐 먹을 것 찾느냐고 했더니 물을 마시려고 한다기에 나도 얼음 넣어서 물 한 컵만 갖다 달라고 주문을 했다. 남편이 물을 들고 오는데 내 것은 예쁜 유리잔에, 자기 것은 밥 공기에 물을 떠 온다.
  "어? 자기는 왜 거기다 물을 마셔?
  "아, 난 머슴이고 당신은 마님이니까 멋있는 잔에 마셔야지"하며 웃는다.
  아! 세상 어느 누가 나만큼 행복할까? 순간 난 아무도 부러울 것 없는 마님이 되는 것이다.

  키가 180이 넘어 걸을 때마다 휘청거리는 남자.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이 없다는 노래도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 사랑한다는 말은 못하지만 결혼하고 18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한결같은 사랑으로나 하나만을 아껴 주는 바보같은 남자. 백화점에 가도 자기 것은 손수건 하나 사길 아까워하면서 내 옷은 더 좋은 것으로 입히고 싶어하는 마누라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오케이 하는 속 좋은 남자. 돈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 이라는 야무지지 못한 경제 관념을 갖고 있지만 쓸데없는 낭비는 절대로 안하고 성실하게 그저 맘 편히 살아가는 남자가 바로 나의 머슴 우리 남편이다.
  하지만 밖에서는 ''''마지막 남은 정의의 기사''''라느니 ''''마지막 휴머니스트''''니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불의를 보고는 참지를 못한다. 남의 일이건 내일이건 가리지를 않으니 회사에서 그와 부딪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가 화를 낼 때는 그럴 이유가 있다고 인정을 해주니 다행이다. 윗사람에게는 절대로 아부를 못하면서 아래 사람들을 어찌나 잘 챙기는지 후배들에겐 가장 존경받는 선배로 대접을 받고 있다. 우린 여름 휴가를 제 때에 가 본적이 없다. 가장 적기에는 후배들 다 보내고 맨 나중에 가기 때문이다.
  싫은 건 죽어도 못하는 성미에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어긋나는 것은 그냥 봐 넘기지를 못한다.
  "당신 직장을 잘 골랐어. 개인 기업체 같으면 벌써 쫓겨났을 거야."하면 피식 웃어 버린다.
  "두분 중에 누가 먼저 프로포즈 했어요? 형수님이죠. 최 선배가 먼저 그랬을 거라는 상상이 안가요."하고 내게 물어온 사람도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다른 사람들하고는 농담을 잘 안 한다. 오죽하면 교육 받을 때도 입사 동기들끼리 반말 하는 게 싫어서 나이를 한 살 더 올려서 말했을까. 아무하고나 친해지기가 어렵지만 일단 친해지면 끝까지 변함이 없다.
  입사해서 한 3년 정도 되었을 때다. 회사에서 망년회가 있었다. 동기 중에 하나가 늦게 결혼해서 새댁을 데리고 참석했다. 한참 먹고 마시는 가운데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선배 한 분이 술이 취했는지
  "야 김상기. 노래 하나 해 봐라."하며 소리를 질렀다. 순간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이 들썩거리더니 그 쪽으로 날아가기 일보 직전이다. 바로 그 정의의 사나이 우리의 머슴이 화가 난 변강쇠가 통나무 들어 올리듯 테이블을 들고 있었다. 놀란 주변 사람들이 겨우 겨우 말렸다. 씩씩 거리는 그를 겨우 밖으로 끌고 나왔고 동기들이 다 따라 나왔다. 결국 망년회는 우리끼리 밖에서 따로 해야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가족도 다 와 있는데 더구나 갓 시집온 새댁이 있는 앞에서 ''''씨''''자도 안 붙이고 함부로 이름을 불렀다는 얘기다. 세상에. 자기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닌데. 그렇게 남의 일로 자기가 흥분해서 혼을 내는 경우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난 늘 아이 타이르듯 가르쳐야 했다. 무슨 말을 하든 흥분하면 안된다. 어떤 경우라도 예의를 벗어나지 말고 차근차근 자기의 의견을 말해라. 화를 내면 대드는 것이 된다. 등등. 후배들을 아끼긴 하지만 아주 조금의 잘못이라도 용서를 안 한다. 취재를 나가서 타사 기자들의 잘못도 못 봐 넘기고 야단을 친다. 그런 사람이 내게는 물 많고 달콤한 배처럼 부드럽고 사근사근하다. 
 
  부엌일을 하다가 손가락을 조금만 베어도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람이 내가 수술을 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니 환자인 나보다 더 사색이다. 끼니도 거르고 좌불안석이다. 아무리 괜찮다고 가서 밥 좀 먹고 오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조금만 아픈 기색을 보여도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란다. 며칠을 병원에서 자며 간호를 하더니
  "지금 이런 수술도 마음이 이런데 와이프가 암에 걸린 사람들은 그 옆에서 지켜보기 얼마나 힘들까?"한다.
  "아마 내가 암에 걸리면 당신이 지레 질려서 먼저 죽을 거야.그치?"했더니 아무 말이 없다
  "그런 성격 아니까 만약에 내가 그런 병에 걸리면  말 안하고 그냥 어디로 사라질 거니까 그렇게 알
  고 있어.알았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하며 휙 돌아눕는다. 아마도 마음 속으론 나대신 자신이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런 남편의 돌아누운 등을 보며 저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퇴원을 하고 나서는 난 완전히 우리 집 마님이 되었다. 큰 머슴과 작은 머슴 둘이 극진히 대접을 해준다. 작은 녀석은 아침이면 깨워도 안 일어나더니 깨우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서 이불까지 개어 놓고, 큰 녀석도 학교에서 밤늦게 와서도 음식물 찌꺼기는 꼭 버려 주고 제가 먹은 그릇은 깨끗하게 설거지까지 해 놓아 나를 흐믓하게 해주었다. 일요일이면 세 남자들이 각자 알아서 거실 방 화장실 각각 나누어 맡아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는다. 아들 녀석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닮는다는데 제 아버지의 하는 양을 보고 자라서 이다음에 자기 아내 위하는 것은 아마도 1등이지 싶다.

  말이야 머슴이라지만 그렇게 나를 위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누가 머슴으로 부리랴. 영원히 함께 할 대감마님으로 모시고 살고 있다. 머슴은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제 할 일만 다하면 그만이지 진정으로 사랑하고 생각해주는 마음은 없다. 남편이 왕이어야 내가 왕비가 되는 것이고, 대감마님이어야 내가 안방 마님이 아닌가. 아무리 머슴이라도 무조건 부리기보다는 존중해주고 사랑으로 대해야 진정한 마님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가끔 아내를 때리고 학대하는 제정신이 아닌 남편도 보고 마치 자신이 왕 인양 식구들을 하인 부리듯 하며 군림하는 남편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남편 모두가 존중해 주고 아껴 줘야 서로에게 왕이고 왕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멋진 머슴을 하마터면 영원히 잃을 뻔 했다.
  씻는 걸 즐겨 안 하시는 시아버지가 우리 집으로 오면서 샤워는 2-3일에 한 번은 꼭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도 잘 지키질 않는다. 며느리가 자꾸 잔소리하긴 어려워 남편을 시켰는데도 안 된다. 그 날 저녁에도 아버님이 샤워 안 한지 일주일이 넘었다고 하니 그이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온다. 그러더니,
  "아버지가 내일 하신대. 파스를 4개나 붙였대." 맙소사. 또 파스 타령이다. 씻기 싫으시면 꼭 파스가 아깝다.피곤하다 핑계를 댄다. 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이 넘었는데...
  "아니 당신은 그런 다고 아버님 하잔 대로 해요? 나하고 약속했잖아요? 오시면 2-3일에 한 번은 꼭   
  샤워하게 하기로." 짜증스러움에 자꾸 말투가 날카로워진다.
  "매일 침대보 갈아대면 뭐해요? 냄새 배면 그만인데."했더니
  "그래? 그럼 내가 아버지 모시고 따로 나가 살게."너무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아니 깨끗하게 씻으라는 것도 잘못인가? 화가 나서 말도 안하고 자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보기 싫다. 남편도 다는 말도 없이 출근을 해 버린다.
  "여보, 나 이제 안 살란다. 시부모 잘 모시는 여자 데려다 살아라. 난 자신없다."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핸드폰 벨이 울린다.
  "그래. 하자. 언제 할래?" 아니 이 남자가.
  "날짜 결정해서 전화해." 너무 단호해서 순간 움찔했지만 ''''그래 못 할 것 뭐 있냐. 어디 해 보자.''''하는 심사로 며칠 뒤 우리 결혼 19주년 되는 그 날 하자고 응수했다. 다시 핸드폰이 왔다. 위자료 문제는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보고 집을 내놓으란다. 집 팔아서 나눠 준다고.난 더러워서 아무 것도 안 받고 몸만 나갈 테니 걱정 말라고 큰 소릴 쳤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터짐이다. 우린 서로 막 나가기 시작했다.그이는 아이들한테 누구하고 살 건가 결정해야 하니까 학원 보내지 말라고 한다. 나도 질세라,시동생한테 당장 전화해서 아버지 어머니 모셔 가게 하라고 소릴 질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동이 걸렸다. 작은 아이 외고 시험이 코앞에 있는 게 아닌가. 다시 전화해서 연주 시험이 며칠 안 남았으니 그 때 지나고 하자고 했더니,"싫어. 다 싫어. 시험이 뭐야. 그냥 진행해."하며 탁 끊어 버린다.
어! 이것 봐라. 오기가 생기면서도 약간은 움찔하다. 이러다 정말 이혼하는 거 아닐까? 하다가도,''''에라 모르겠다 가 보는데 까지 가보자 하면 하는 거지 뭐.''''오기가 솟는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 이혼할 거야."하고는 울어 버렸다. 깜짝 놀라며 어디 가서 차 한잔 하자는 그녀에게 청소하고 조금있다 만나자고 했다. 소정 엄마와 함께 행주산성 밑에 있는 작은 찻집에 앉았다. 앉자마자 그녀는 
  "야  이혼은 무슨 이혼? 이혼한다는 여자가 청소까지 하고 할 거 다하니?" 하며 배시시 웃는다.
  따끈한 차를 마시며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니의 결혼 이야기와 우리들이 지내 왔던 시간들을. 그녀가 우울의 늪에서 벗어나 지금은 누구 못지 않게 행복하게 보내고 있는 비결을 난 알고 있다.
  "난 연모아빠 이해해. 여태 마누라 하잔 대로 다 하고 마누라 하고 싶은 것 다하게 해 주면서 참아온 사람이 얼마나 화가 나면 그러겠어? 우리 집은 그 반대야. 소영 아빠가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연택아빠 같았잖어?" 듣고 보니 그렇다. 우리 남편은 여지 껏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도 못하고 살았다. 가족들을 위해 스스로의 욕심은 버린 것이다. 그 동안 아무 불만없이 장모님 모시고 살았고 학교 일로 동네 일로 바삐 돌아 치며 어쩔 때는 밤 늦게도 들어오는 마누라에게 싫은 내색 한 번 안하고 잘 봐줬다.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사회적인 일도 욕심 껏 다해 보라며 외조를 아끼지 않았다.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했을 뿐 남편을 위해서 뭔가 해준 게 없다. 이제 시부모님을 모시게 되어 겨우 내 도리를 조금 하고 있는 건데... 생각해 보니까 난 참 못된 마누라였다.
  "여보 미안해. 다시는 그런 소리 안 할 게 한번만 용서해주라. 사랑해."하고 문자를 보냈다. 금방 벨이 울린다.
  "나야. 어딨니? 밥 먹었니? 알았으니까 마음 다듬고 들어가. 얼른 밥 먹구." 금새 마누라 밥 걱정이다.
아 이런 남편을... 
  
  "키 180 어쩌고 써 있는 거 보니까 내 얘기 쓰는구나? 내 흉보니?"하며 내 등뒤에서 기웃거리며 보고싶어 안달을 하던 우리 집 머슴은 이제 포기하고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있다.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신 뒤론 더욱 머슴이 돼 버렸다. 화장실 청소며 쓰레기도 갖다 버려 주고 내가 걸레질이라도 하고 있으면 얼른 뺏어서 자기가 한다. 저녁에 운동갈 시간이 다 되면 설거지까지 해주며 얼른 가서 운동하라고 등을 떠민다. 이렇게 사랑스런 머슴을 또 어디 가서 만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