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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의 "그 많던 싱아는~?"


BY [리 본] 2003-06-26

우리가족의 "그 많던 싱아는~?"

기어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꿀꿀한 밤이다. 전쟁으로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부녀자들이다. 지금 적막한 도시에 남은 이들은 누구인가? 있는자들은 벌써 삼십육계 줄행랑 다 쳤을 것이다. 못가지고 없이사는 소외계층만이 죽음의 공포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도시를 포장지에서 띁지않은 숨죽인 건전지처럼 그렇게 숨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아... 니들이 전쟁을 알기나 하니? 시시각각 다가오는 시뻘건 죽음의 공포를... 나는 분명 전후세대이다. 동존상잔의 전쟁이 발발하고도 5년이나 후에 태여난 전후세대이다. 비록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진 않았지만 언니오빠들이 모였다하면 하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던 이야기라 전쟁을 경험한 사람보다 더 선명하게 피부로 느낀다. 이땅에서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할 동족상잔의 비극... 언니와 오빠에게 토막토막 들은 이야기들은 모아서 맞춰본다. 그때 우리는 서울역 근처 순화동에 살았고 아버지는 서울역에 근무하셨다. 가족구성원 부모님과 외할머니 그리고 사범학교 다니던 큰언니 아래로 남동생이 네명 있었다.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였단다. 새벽부터 삼팔선부근에! 서 쿵쿵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쟁이 났다고... 이전부터 전쟁발발 소문이 무성했었지만 자다 날벼락 맞는격으로 무고한 소시민이었던 우리가족들은 인공치하에서 몇개월을 서울살이를 해야 했단다. 교통의 심장부인 서울역의 기능은 대단히 컸을 것이고전날 근무중이시던 아버지는 가족에게 연락도 못하고 직원들과 부랴부랴 피란을 떠나셨단다. 서른중반의 어머니는 남편 생사도 모르는데 피란갈 수 없다고 고집해서 결국은 폐허가 된 서울에서 인공치하에 전쟁을 맞이하신 것이다. 언니 아래로 동생이 41, 43, 45, 47년생들이 있었으니 두명을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이고 두명은 엄마 치마폭에서 재롱이나 떨 나이였을 것이니 예전엔 공무원의 생활이란게 빠뜻해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설령 돈이 있다 한던 전시중엔 한낱 종이조각만도 못하였던 것이다. 폭염이 내리 쬐는 한여름이 되었는데 식솔들의 때거리가 없어 손가락을 빨 처지가 되었단다. 그때 외할머니가 분연히 털고 일어나서 전에 살던 오류동에 갈 채비를 서두르셨단다. 한강다린 이미 폭파되고 여의나루를 해서 염천더위에 어린 손자를 앞세워 머리엔 옷감(양단)을 이고 몇시간을 걸어가서 오류동! 에서도 더 촌으로 들어가 보릿쌀 몇됫박과 양단을 맞바꾸어 되집어 서울로 오셨단다. 그러고도 호구지책이 해결이 안되서 전전긍긍 하는터에 희소식을 들었단다. 누군가 흘깃하는 소리가 서울역근처 염천교에가서 밥장사를 하면 돈벌이가 된다고 해서(전쟁중엔 먹는것에 더 애착을 갔는다고 함)외할머니는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해가지고 큰손주와 함께 좌판을 벌리고 장사를 하려고 하는데 미군비행기가 서울역을 폭격하는 바람에 콩튀 듯 팥튀 듯 사람이 조각나 흩어지고 사방팔방으로 핏투성이가 튀여 아수라가 따로없고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지경이였단다. 외할머니는 정신을 차려 폭탄 맞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오셨는데 큰오빠가 오질 않아 집에선는 큰오빠가 죽었는줄 알고 대성통곡을 하고 초상집 분위기였단다. 폭격을 맞은 큰오빠는 어찌 되었을까? 비행기 폭격으로 사방팔방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두려움에 오빠는 죽어라하고 뛰어갔단다. 얼마쯤 울면서 뛰는데 어떤 아저씨가 너 어디로 가는거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순화동에 산다고 하니 여긴 순화동이 아니라 만리동고개라고 순화동으로 가려면 반대로 가야한다고해서 정신을 차려 반대방향인 서울역쪽으로 걸어서 저녁 무렵이 되어 집으로 들어 갔더니 얼굴은 온통 핏투성이고 손으로 만지니 물컹하고 살점이 잡혀 폭탄을 맞았나보다고 자세히 보니 다른사람의 살점이 큰오빠의 얼굴이 붙어 있는 것이어서 불행중 다행이고 죽은아들 다시 왔다고 울었다 웃었다 희비쌍곡선이였단다. 그후론 밥장사는 때려치우고 어머니가 왕십리까지 걸어가셔서 남의 배추밭에서 일을 해주시고 배추를 조금 얻어다가 식구들 목에 거미줄 안치게 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셨단다. 그러다보니 한두달이 흐르고 전쟁 분위기에 조금씩 적응이 될 무렵 옆집에 언니또래의 그만그만한 처녀들이 있었는데 도나쓰장사를 해서 밥은 굶지 않는다고 언니가 나도 하겠다고 가르켜 달라고 하니까 소공동에 가면 중국사람 가게가 많이 있는데 거기서 도나쓰를 떼여다 팔면 된다고 해서 양은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도나쓰를 떼어다가 집앞에다 좌판을 만들어 놓고 도나쓰장사를 했단다. 처음엔 창피했지만 차츰 재미도 붙어 고구마도 삶아서 무더기쳐 놓고 팔고 그려면서 위태위태하게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큰오빠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육이오가 난지 얼마 안되어 남대문 부근엘 갔단다. 남대문 지하도에 시체가 인산인해를! 이뤄 부패하기 시작해 코를 못들 지경인데 웬남자가 큰 닛뽄도을 휘두르면 시체를 이리저리 자반뒤집들 샅샅이 뒤지고 다니드란다. 뭘하나 싶어 숨어서 보고 있는데 그 사나이 팔뚝에 줄줄이 시계를 차고 죽은이들 사이에서 시계나 반지 금이빨등을 훔치는 전장터의 하이애나였던 것이다. 열두살의 사내아이가 뇌리에 얼마나 뚜렷이 각인됐으면 지금도 몸서리 치시며 말씀하신다. 그뿐이라 툭하면 인민재판에 참석하라 그리고 굴비두름 엮듯이 줄줄이 엮어 총살하는 장면도 목격하고 미국대사관인지 러시아대사관 폭격하는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가재도구를 집어내가는데 빠르기가 홍길동이 같았고 냉장고에서 쏱아진 보도 듣도 못한 열대과일들에 눈이 휘둥그래져서 넑이 나갔었다고.. 보석처럼 영롱한 크리스탈 산드리에가 떨어져 깨졌는데 얼마나 아까웠으면 두고 두고 이야길 하셨다. 주변머리 없는 언니는 겨우 집어 온다는게 연필인가 색연필인가를 갖고 왔다고 한다. 고지식하고 곧이곧대로인 성격이 우리식구들의 특성인데 언니도 분명 그랬으리라. 육이오가 발발하고 다음날인가 언니는 용두동에 있는 학교에(서울사범 5년제) 걸어? ?갔단다. 학교마당에는 여학생들이 오와열을 맞춰 줄을 서 있었는데 언니는 감이 안좋아 화장실에 얼른 숨었단다. 잠시후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언니는 문을 잠그고 숨죽인채 숨었있다 나중에 나와보니 그 학생들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단다. 아마도 학도간호병으로 끌려 갔을꺼라고... 언니의 기지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고... 그후로는 집에서 도너스장사 고구마장사 동생들 돌보기... 외할머니와 큰딸이 버팀목이 되어주어서 어머니는 든든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단이 생기고 만것이다. 이화고녀인가 경기고녀인가 어디서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들의 식사를 해결하려면 일손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지목되어 할 수 없이 부역을 해야 했단다. 고단하게 며칠을 하는터에 외할머니 말씀이 아버지도 공무원인데 나중에라도 빌미를 제공하면 안된다고 그만 손을 떼야 하는게 좋을성 싶다하시며 이런저런 구실을 부쳐 인민군 밥해주는 부역에서 손을떼고 우리식구는 외할머니의 조카딸뻘 되는 아주머니가 계서 약수동산동네 방공호로 식솔들을 이끌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게 불과 삼개월안에 일어난 사건이다. 주거지를 약수동으로 옮긴 ! 언니는 순화동 집이 염려되어 가끔씩 집에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단다. 그날도 집이 궁금하여 순화동으로 가는 길이 였는데 인민군을 퇴각하고 국군은 진격하는 사람이라곤 씨알도 찾아보기 힘든 중간에 샌드위치처럼 낑기게 되었단다. 총알이 핑핑 날아오고 언니는 집방향르로 뛰어가고... 퇴각하던 인민군이 언니에게 너 어디가냐라고 물었단다. 언니가 순화동 집에 가요 하니 인민군에 지금 갈 수 없으니 빨리 돌아가라고 소리치면서 퇴각하는데 인민군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드라고... 아마도 그무렵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연합국 혹은 국군이 서울로 오는 무렵이 아니였을까? 그리고 얼마후 9.28 서울수복이 있었단다. 가족들은 기쁜 마음으로 순화동집으로 돌아오고.. 굶어죽지 않기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인민군과 중공군이 다시 밀려 왔다. 이른바 1.4 후퇴가 그 시기였다. 더이상 서울에 버틸 수 없는 가족들은 철도가족이란 이유로 기차화물칸 한귀퉁이를 배정받을 수 있었단다. 부산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였는데 발디딜 틈 없이 사람이 타고서 나중에는 기차지붕에까지 사람이 올라타더란다. 간신히 몸을 의탁하여 ! 위을 쳐다보니 기차천정에 스르르 밑으로 물러 내려 앉더란다. 엄동설한에 끔찍한 전쟁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고저 기차지붕에 올라탄 사람은 떨어져 죽고 기차 터널 지붕에 부딪쳐 거의 다 죽었단다. 과연 산다는건 무엇이고 죽는다는건 무엇인지... 서울역을 출발해 서너시간 와서 겨우 한숨 돌리게 한 곳이 수원역...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 나가 볼 일도 보고 눈에 쌀을 건성으로 씻고 삭정이를 주워 대충 밥이랍시고해 주린창자를 메꾸고 다시 출발하여 엉금엉금 가다다 어디쯤 가서 쉬고.. 그러면서 대구인가 도착하니 그때가 설날무렵이 였는지 미군들이 어린아이 손에 사탕을 쥐여 주드란다. 피로와 공포뒤에 맛본 달콤한 캔디의 맛은 회가 동하도록 맛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좋은나라였고 미군은 우리에게 달콤한 캔디와 쵸코렛을 주는 좋은 군인 아저씨로 남았었다. 우여곡절끝에 부산에 도착해서 아버지를 상봉하고 주어진 사택에서 옹색하게 살았단다. 부산은 우리가족에게 슬픔을 안겨 주기도 한 도시이다. 당시 막내이던 다섯살배기 오빠가 홍역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등졌다한다. 원래 놓친 고기가 커보이는 법이라고...외할머니는 생전에 다섯살 짧은 생을 살다간 오빠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창가를 하도 낭랑하게 잘불러 노래 한자락 불러봐라 하면 맨바닥에선 절대 안 부르고 다듬이돌이나 좀 도드라진 곳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의 주레퍼토리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흐르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그노래 였단다. 전쟁의 시름에 젖은 식구들은 막내의 재롱을 보며 포화속에 얼룩진 시름을 달래곤 했다는데... 막내가 숨을 거두던날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여름날이 었는데 아버지께서 용두산 산기슭에 오빠를 묻고 왔단다. 밤에 생각해보니 아이를 잘 못 묻은 것 같다고 산머리방향에 머리가 놓여야 하는데 반대로 묻은것 같다 하시면서 다시 산으로 가서 오빠를 똑바로 묻어주고 오셨다는 것이었다. 부산의 피난시절은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었다고 언니는 회상한다. 장사수완이 좋은신 할머니는 미제물건 파는 루트를 알게되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들을 팔으셨단다. 짭짤하게 돈도 버시고.. 저녁이면 국제시장인가 어디로 음식을 사먹으러 가는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이북사람들이 모여서 상가를 이루었고 이북음식들을 만들어 파는 곳들이 있어 가지가지 음식들을 먹을 수 있어 나름대로 먹는 즐거움이 있었단다. 난리통엔 여자가 젤 위험하다고 외할머니 고집에 언니가 학업도 마지지 못하고 결혼을 하고 아버지는 내가 태여난 곳으로 발령을 받으셔 서울로 올라오시고 외할머니는 부산이 좋다고 혼자사시겠다고 안따라 오시고 한동안 부산에 남으셨단다. 환도후... 순화동집에 가보니... 언니가 시집갈때 준꺼라고 장만한 영국제도자기그릇과 옷감들은 마당에다 몰래 파묻어 놓고 갔는데 누가 다 파갔단다... 난리통에도 하이애나는 득실거리고..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경우도 있드란다... 아아.. 전쟁.. 다시는 이땅에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일어나서도 안되고 지구상 어느곳에서도 전쟁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전쟁고아, 과부, 기아, 고통, 절망, 죽음... 그리고 국토의 유린...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란 단어는 없어야한다.


박완서님의 "그 많던 싱아는..." 떠올라 제목에 넣어 봤습니다. 비록 전쟁을 경험하진 못한 세대지만 참담함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조속히 평화적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에 두서없이 적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