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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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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와 시어머니


BY jinhee50 2003-06-14

행길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당신은 대나무와 시어머니 중 누가 더 소중한가 묻는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기 이 문제로 가슴앓이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며느리는 현관 주변에 대나무를 심어 놓고, 커 가는 것을
지켜보는 즐거움에 흠뻑 취했다.
이른 아침,
신문을 가지러 현관문을 열었을 때 대나무 잎은,
아무리 가물었을 때라도 이슬방울을 조롱조롱 매달았고,
그 이슬은 해가 떠오르는 각도에 따라 영롱하게 빛났다.
봄 날,
햇빛에 아롱거리는 새 순은 연두빛의 찬란함을 보여주었고
비 오는 날, 비에 젖어 늘어진 잎은
화폭에 옮기고 싶을 만큼 처연해 보였다.
지난 겨울,
몇 포기가 얼어 죽었을 때의 가슴 아픔은,
차마 바로 베어 버리지 못하고,
새 순을 받은 후에야 베어내 말린 후
거실에 걸어 놓고 때때로 바라 볼 정도였다.
며느리는 그렇게 대나무를 사랑했다.
이제는 키가 클 대로 커 현관문을 훌쩍 넘고 잎도 우거져,
드나들 때는 대나무를 손으로 제치고 고개를 숙이게끔 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아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며느리는 신문을 가지러 나오다가.
비에 젖은 대나무 잎이 뺨에 스치는 감촉에 가슴이 뿌듯했다.
그래서 그날은 외출하지 않고 비에 젖은 정원을 감상하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시어머니는 아침 일찍 며느리네 집엘 가셨다.
며느리 집에 딸린 텃밭을 돌보려고....
마침 비가 온 김에 풀도 뽑아 주고, 들깨 모종도 하고,
비둘기가 쪼아먹어 다시 심은 콩이 잘 자라는지 궁금도 하고.

시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비에 젖은 대나무를 제치며
문을 열러 나오는 며느리를 보시고는 결심을 하셨다.
팔목이 아파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며느리를 위해,
언제나 바쁜 아들을 위해 당신이 대나무를 잘라내
자식들이 편하게 현관문을 드나들 수 있도록.
그래서 그날,
정원감상을 포기한 며느리가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시어머니는 손수 그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웬 일인지
며느리는 그 시원하게 잘린 대나무를 보는 순간
그만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울음에 어안이 벙벙했다.

대나무는 한 번 잘리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어찌해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 집도 아닌데, 어머니가 사실 집도 아닌데
왜 어머니 마음대로 자르셨냐고,
어머니는 비둘기가 그까짓 콩 싹 좀 쪼아먹었다고 속상해 하시면서
왜 제가 아끼는 대나무는 잘라버리셨냐'는 며느리의 외침이
이번에는 시어머니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며느리에게,
저 대나무만도 못한 존재인가 싶어서
그만 가슴에 피멍이 들고 말았다.

그 며느리의 시누이이고, 그 시어머니의 딸인 나는
그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뒷산 올라다니며 나도,
내가 직접 가꾼 것은 아니더라도
그곳에 있는 나무와 풀,
그리고 그나무와 풀에 핀 꽃들을 사랑했고,
누군가 그것들을 훼손했을 때 적의를 느껴보았기에
나는 내 올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돼지 않은 땅뙈기로 평생 농사지으시며
자식 여덟을 길러내신 어머니,
그 어머니께 소중한 것이란,
오직 자식들과 그 자식들을 길러낸 곡식이나 채소같은 것일 뿐.
단지 보고, 느끼고 즐기시려고 무엇을 가꿔보신 적이 없으셨던
어머니의 삶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울면서 어머니를 원망하는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나의 어머니를,
가슴이 뜨겁게 이해할 수 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