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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야기---4


BY lina33 2003-06-11

결혼한지 일년이 지났는데도 혼인신고를 하지않았다.
친정에서는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나를 불러 물었다.
별일 아니라면서 곧 한다는게 바쁘다보니 늦어졌다고 간단히 말씀드렸다.
혼인신고를 할수없었던 이유는 엄마의 성을 가진 남편이 그대로 혼인신고를 하면 다음에 이름과 성을 바꾸었을때 여러가지 또 복잡한 일들과 서류들이 만들어져야하니 차라리 정리한 다음에 하는편이 좋겠다고 했기때문이었다.

또한 이를 미룬 이유는 시누를 결혼시킨후에 자신의 호적을 정리하겠다는 오빠로서의 마음이었다.
결혼해야할 여동생이 호적으로 오빠와 다른 성을 가진것을 시댁에서 알면 달가와 하지않을것이라고 생각한 오빠로서의 배려가 있었던것이다.

또한 이름과 성을 바꾼것은 남편이 중학교 입학할 무렵이라고 한다.
시어머니께서 재혼을 하셨고 남편도 그 의붓아버지의 성을 가졌었고
시어머니의 또 한번의 이혼으로 딸과 아들을 같은 성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의 성으로 바꾸고 이름도 바꾸었던게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이 무렵 시아버지께서 가끔씩 우리를 보러오셨고 시어머니는 아주 다정하게 잘 대해주셨다. 시아버지도 시어머니를 그렇게 대하셨다.

시아버지의 호적에는 남편의 옛 이름이 그대로 살아있었고 2중 호적이 되어있었다.

시아버지께서 먼저 언급을 하셨다.
남편도 아이들이 태어나면 할아버지의 성을 물려받기를 원했기에 일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이때부터 시어머니의 태도에는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시아버지께 양육비를 청구하는 소송을 내겠다는등등,..
시누도 나와 남편을 곱게보지않았고 사사건건 원망했다.
시누는 자신이 남편과 같은 아버지를 갖고있는것으로 지금도 알고있다.
하니 자기는 그대로 엄마성을 갖고있고 아들만 아버지가 찾아간다고 생각했을것이다.
원망은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주앉으면 우리는 시어머니의 원망과 욕설(?)비숫한 말들을 들을때가 많았고 남편은 가급적 시어머니와의 대면을 피하는것 같았다.
남편이 집에있는 시간이 아주 적었기에 여러가지 있었던 집안 이야기를 , 내가 받는 많은 스트레스를 모르고있었고 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남편에게 늘어놓는다면 이간질하는 격이 되니 그냥 삭이고 또 삭이고 그렇게 해야했다.

처음에 몰랐던 남편에게도 같이 생활을 하면서 느껴지는 많은 벽들이 있었다.
너무 다른 환경에서 생활해온터에 너무 다른 사고방식이 많았다.
비교적 풍족하고 9남매의 막내로 온갖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유롭게 자라온 나와 3살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이집 저집 떠 돌면서 외딴마은 남의집 양자로까지 갔다오고 혼자서 생활고를 이겨내야했고, 고등학교때부터 자치하면서 고학을 해야했던 남편과는 좁힐수없는 벽같은게 너무 많았다.
남편은 그렇게 자라온 사람같지않게 아주 반듯했고 낭만적이며, 상당히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어린시절의 말들이 다른 사람의 말처럼 느껴지정도로 잘 성장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끼는 벽은 너무 두터웠다.
결혼 초기는 일때문에 일주일 2~3일정도만 집에 들어왔고 그러면 나는 아침에 밥과 갈아입으 옷을 싸들고 일터로 나가야했다.
아마도 혼자서 자유롭게 생활하던 미혼시절의 습관도 있었나보다.
또한 한달에 한번 또는 2달에 한번정도로 거의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이있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또한 어린시절 어머니에대한 불신이 모든 여자에대한 불신으로 번져있었고 모든 여자들은 남자를 결국배신한다고 했다.
이런 뿌리깊은 여자에대한 불신과 의심등이 복합적으로 우울증 증세가 시작되면 나타나기도 했다.
아마도 평상시는 스스로 이런 감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했기에 나타나지않았을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우울증이 시작되면 나에게만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피를 말리고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오해는 가슴을 찢고싶은 시간들이었다.
오해란 정말 미치는것이다.
사고방식의 차이로 오해가 생기는것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별 생각없이 그냥 대화속에서 나온말들이 남편에게는 내가 상상할수없는 이유가되어 나에게 화살이되어 돌아왔다.
이건 설명할수도 변명을 할수도 없는 이유들이었다.
변명을 하고 설명을 하려고하면 더 풀기 어려운문제가 되니 나는 사과를 하고 뒤로 물러나는것이 현명하다는것을 몇번의 경험으로 알게되었고 정상으로 돌아왔을때 가끔 오해에대한 설명을 하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을 내가 견딜수있었던것은 남편이 거짓없이 자신의 성장과정을 나에게 설명해주었고 이야기해주었기에 나는 이런 남편의 성장과장을 마음 아파했고 내가 어루만져주리라 생각했던것이다.
대학때 교육학과정을 이수하면서 들었던 여러가지 심리적 사항들이 많이 도움이 되었고 따라서 나름대로 심리학에 대해서 책을 통해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것이 아마도 많은 도움이 되었던것 같다.
시어머니는 아들의 이런 심리상태를 알수없었다. 같이 생활한 기간이 짧았고 자식에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그렇게 많아보이지도 않았다.
시어머니는 자기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런 복잡한 일들을 친정집에는 말할수없었다. 친한 언니나 친구에게조차도,..
그러자니 나도 정신병처럼 가만 앉아있어도 집이 빙글빙글 돌기도하고 항상 혼란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하고 답답하고 ,.. 이런 증상들이 더 심해지고있었지만 나는 이런 내 증상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얼마후 아이를 갖게되었고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시어머니의 표현은 강도를 지나쳐 내방에 부적과 은도끼 목걸이까지 , 심지어 발가벗겨놓은 남의집 남자아기 사진까지 걸어놓는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정도가 뭐 어떠랴,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의 내 심리상태로는 이 정도도 받아들이기에 너무 힘들었고 신경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아이를 가졌지만 행복해본 기억이 없다.
그다지 먹고싶은 음식도 없었고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2월달이었는데 감홍시가 너무 먹고싶었다. 마치 남편과 시장을 지나가고있었는데 감홍시가 진열되어있었다. 아마도 거봉이었던것 같다. 지금도 나는 거봉 감홍시를 좋아한다. 아 저거 맛있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저런것 비싸기만하고 별 맛도 없다고 말했다. 참고로 남편은 감을 좋아하지않는다. 첫 아이를 갖고 먹고싶었던게 그것이 처음이었고 무안하게 끝났다. 좀 무심한 남편이 섭섭하기도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또 한번은 동대문에서 남편공장일을 돕다가 나 먼저 퇴근하는데 길가에 돼지고기 볶음 냄새가 너무 좋았다. 갑짜기 식욕이 돌면서 너무 먹고싶었다. 그런데 주머니사정이 여의치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게 전부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태어날 기일이 얼마남지 않게되어 어디서 해산을 할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나는 친정으로 가고싶었다.
시어머니는 친정으로 보내고싶지않았다.
당신의 주장은 친정어머니를 서울로 불러올려 1달정도 도와달라고 하시고 싶은것이었다.
나로서는 당치도않는 말이었다.
차라리 나 혼자 고생하는게 낫지 어떻게 연세가 시어머니보다 20세나 위인 할머니인 내 친정어머니를 시집에 불러 많은 식구들까지 있는데 수발을 들게 할수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마칠이 있었다. 시어머니인 당신은 바빠서 내 뒷바라지를 하실수없다는 이유셨다.
반대를 무릎쓰고 친정으로갔고 아들이 태어났다.
남편은 바쁜일로 15일후에 친정으로 아들을 보러왔었고 시어머니는 한달후 내가 서울로 갔을때 첫 대면을 했었다.

아이를 낳으려 산부인과에 갔을때 산모들곁엔 모두 남편들이 있었다.
아픔을 함께 나누며 안스러워 어쩔줄을 몰라했었다.
아이를 낳은 병실에도 밤이면 어김없이 퇴근해오는 남편들이 부러웠다.
내 곁에는 연로하신 친정어머님이 안스러운듯 막내딸곁을 지켜주셨고 지극히 당신이 아픈것 보다 더 아프게 나를 돌봐주셨다.
아들은 건강했고 갓 태어난 아이답지않게 단단하게 보였다. 아마도 엄마가 많이 움직여야했기에 2.4킬로그램이라는 몸무게로 태어나게되었고 아이도 운동을 많이해서 체격이 단단해졌더것인가 보다.

한달후 서울 시댁으로 오게되었고 나의 일은 한 아이가 태어났으니 더 많아졌다. 그렇나 나는 아이가 있어 행복했다.

아이가 점점 자랄수록 내 걱정은 새롭게 시작되었다. 아이가 자랄때 받는 환경적 영향을 나는 생각하고있었다.
아이는 내 보살핌으로 잘 자랐고 2개월이 되었을때는 그림책을 보면서도 아이가 좋아하는 노란병아기 그림을 볼때는 어김없이 소리내어 웃었다. 신기했다. 1개월때부터 나는 그림책을 읽어주고 보여주었다. 물론 내가 대학졸업후 잠시 친구 유치원에서 3~4세 아이들을 가르쳐보았고 강남쪽에서 유행하던 2~3.4세 아이들의 소그룹 영재교육 교사 교육도 받았던 경험덕분이었을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아이의 교육이 효과가 있다는것을 알았지만 실제로는 알수가 없었다. 경험이 없었기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이런 경험을 했을때 그 신기함과 기쁨은 이루 말할수없었다. 자신감이 생기고 내가 해야할일이 신나게 추가되었다.
그림은 원색으로 커다랗고 예쁘고 간략하게 그려진것으로 책을 골랐다.
음악은 주로 F M 클래식 채널을 고정시켜놓았다.
동요도 들려주곤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믿지않았다. 이런 아이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신기해했다.
틈틈이 나는 동요를 자장가를 불러주고 많은 그림책을 보여주었다.
업고 시장을 다니고 시야가 잘보이는 길을 많이 다녔다.
많은 소리를 들려주고 많은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3월쯤 되었을때 아이는 엎고 시장을 가면 레코드 가게 앞을 지나게되는데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만 나면 엉덩이를 들썩거리는것이었다.
우리집엔 테이프를 넣어 들을수있는 카세트가 없었기에 가장 기본적인 모델로 작은 것으로 한개를 구입해 이것 저것 어린이 동요들을 들려주고 이야기들을 들려주곤했었다.
6개월이 되었을 무렵 집안에 큰 사건 한가지가 발생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분가를 결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