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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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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와 이등병의 차이


BY 마음자리 2003-06-03

결국은 그 비빔밥이 문제였다.
내 삶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버린 그 비빔밥.

1983년 5월 8일 저녁. 경북 구미 시외버스터미널.
그 여자를 태운 버스가 출발했다. 뒷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눈이 충혈된 그 여자는 아쉬운 헤어짐을 붙잡기라도 할 듯 오래도록 손을 흔들며 작아지다가 점이 될 무렵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마주 흔들던 손을 내리자 가슴으로 허전함과 외로움이 밀려들었고 그 바람에 밀려난 뭔가가 가슴에서 울컥 솟구치다가 다행히 목에서 걸렸다.

가까운 이발소에 들어가니 대목을 맞은 이발사는 쉴틈이 없었을텐데도 행복해 보였다. 잠시 후, 거울 속에 파르라니 깎여진 머리를 어리둥절 만져보고 있는 내가 보였다.

다음날 아침, 입영열차가 출발하는 구미역에는 <바보들의 행진> 영화에서 보았던 병태와 영자의 멋진 키스는 어디에도 없었고, 살풍경한 인솔헌병들의 외침소리들만 가득찼었다.

논산훈련소의 첫날밤. 스물 다섯살의 입영.
잠은 오지않았고 팔벼개를 한 채 아쉬운 기억 한자락 붙잡고 늘어졌다.
...
...
그해 초의 어느 겨울날. 경북 영천에 있는 3사관학교 교정.
오전 체력검정을 마치고 오후 2km 구보를 앞둔 점심시간.

구내식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학사장교 응시 체력시험을 보러온 응시생들로 가득찼고, 줄 끝에 서서 받아든 비빔밥은 오전의 체력검정으로 소진한 기운을 다시 채우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남겼어야 했는데...남기기엔 너무 맛있었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와 솔담배 한개피를 입에 무는 순간...
"구보 집합!!"
헐레벌떡 달려가니 어느새 출발. 우리 조가 맨먼저 달렸다.
구보하는 중에 뱃속이 울렁거리더니 결국 배를 가득채운 그 비빔밥이 문제를 일으켰다. 목적지 반도 못미쳐서 오바이트...
대학 4년동안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데 장교가 되겠다는 꿈마저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 놈의 비빔밥. 남겼어야 했는데...
...
...

같은 소대에 편성된 훈병 동기들은 내무반장이 없을 때면 나를 형이라 불렀다. 이마에 그때 이미 완연히 드러난 대머리 조짐에다 같이 생활하며 나이를 알고나더니 그냥 이름 부르기가 어색했나보았다. 그들은 군에 지원입대한 훈련병들이라 나이가 18에서 20살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나를 친근하게 대했지만 나는 물에 떨어진 기름처럼 겉돌고 있었다.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인정하기가 너무 어려웠었다. 꼴에 지방대학이라도 졸업했고 장교시험에 응시했던 내가 제대로만 되었다면 지금쯤 소위 계급장을 단 초급장교가 되어 있었을텐데, 고작 이등병 작대기 한개 매달고자 지금 이러고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나에겐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너희들과 달라~''
현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보니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만 자꾸 스며들었다.

우리 소대에 18살 먹은 동기생이 한명있었다.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고 군에서 기술 한가지라도 배워 사회에 나가고 싶다는 꿈을 가진 예쁘장하게 생긴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운동신경이 아주 둔한데다가 눈치까지 없어서 우리가 받은 대부분의 단체기합은 늘 그 친구에게서 비롯되었다.
동기들은 늘 그 친구를 고문관이라 놀리며 질시의 눈빛을 보냈고 나 또한 그들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다.

삼주차 훈련에 들어갈 무렵, 저녁에 총기를 닦다가 그 동기생의 총이 실수로 내 발등에 떨어졌고 내 발등의 살 한점이 떨어져 나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상처는 계속되는 훈련으로 나을 새 없이 더욱 크게 곪아갔고 급기야 훈련의 마지막 과정인 4km 구보를 앞두고는 군화를 신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구보에서 탈락되면 훈련 유급. 지금까지의 고된 훈련을 새로 받아야 된다는 말이 들렸다. 설마 그럴리가...만약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아...

한쪽 발엔 군화를, 상처난 발은 맨발로 완전군장을 하고 구보 대형으로 섰다.
2km 구보를 못해서 장교시험에 탈락했던 나...

출발~
부대 내 포장도로. 1키로 쯤 달렸을까...아스팔트에 닿는 맨발이 갈라지는 느낌이 들 즈음...

"형~ 총 이리줘요~"
걱정이 되서 내 옆을 달리던 그 어린 동기생이 내 총을 대신 들겠단다. 앞뒤 가릴 계제가 아니라 얼른 총을 넘겼다. 곧이어...

"형~ 군장은 내가 들께~"
"형~ 철모는 내가~"

앞뒤에서 같이 달리던 어린 동기생들이 앞다투어 내 몸에 붙은 짐들을 떼어갔다. 홀가분한 몸이 된 나도 혹시 구보대형을 흐트릴까봐 발가락을 오무린 채 열심히 뛰고 또 뛰었다.

내 총을 받아간 고문관이라 놀림받던 어린 동기생이 역시 힘든지 비틀거리자 그 주변의 동기생들이 또 앞다투어 그 친구의 짐을 받았다.

"한가치 담배~도~ 나누어 피우고~ ..."
울려퍼지는 군가 속에 우리들은 점차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골인 지점이 보이자 군가소리 더욱 우렁찼고, 다왔다~ 조금만 더~ 서로 격려하며 드디어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목적지에 다다랐다.

누구하나 지쳐 쓰러지지 않은 채, 서로 얼싸 안았다.

"형~ 잘했어~"
"그래~ 너거도 잘했다. 고맙다~"

고문관도, 나도, 나이 어린 동기생들도 서로 얼싸 안은 채 하나가 되었다. 전우가 되었다.

그 다음날인가...노란 작대기 한개 그려진 이등병 계급장을 받았다. 별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이등병 계급장.

한땀 한땀 어슬픈 바느질로 이등병 계급장을 군복에 다는 중에, 내 속에서 들려오던 소리.

''그래...새로 시작하는거야~''
''제일 낮은 곳에서 다시 기어오르는 거야~''

잠시 바느질을 멈추고 이제야 전우가 된 내 동기들을 오래 기억 속에 담기위해 머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