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곤곤하고 지칠때면 어머니의 자궁속처럼 어둡고 편한 곳으로 숨고 싶을때가 있다.
그럴땐 나는 곧잘 유년의 다락과 벽장을 떠올린다.
정거장 집 가겟방위에 공간을 마련한 일직선 나무사다리를 타고
죽기살기로 아둥바둥 올라가면 희안하고 색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켸켸묵은 책들과 신문철들
그리고 야구글러브와 야구공 야구방망이...
권투글로브와 럭비공과 짝을 잃고 나뒹구는 스케이트 한짝...
기타와 하모니카와 나팔도 있었고
해부기 제도기와 망원경과 티자도 한쪽에 걸려 있었다.
다락방에 올라가면 중, 고, 대학교에 다니던 오빠들의
잡동사니 물건들이 이리저리 두서 없이 굴러다녔다.
창문도 없고 불도 안들어 오는 거길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서
이것저것 정신없이 뒤적질하다가 보면
잡지책에 한컷 들어있는 만화도 즐기고
벽을 바른 신문 영화포스터도 눈여겨 보고
생물도감과 지리책을 열심히 들여다 보면 매우 신기하고 재밌었다.
매캐한 먼지내음이 코를 아리게도 했지만
바깥세상과 단절된 호젓함을 은밀하게 즐기며
숙제와 심부름 잠시 잊어도 되는 편안한 장소였다.
다락이 신세대를 대표하는 공간이었다면
벽장은 구세대의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는 공간이었다.
방의 아랫목에 뒤쪽에 해당하며 부엌의 천장에 해당하는 곳이었는데
벽장문는 4쪽으로 된 여닫이 형태로
사군자나 십장생같은 그림들을 붙여서 나름대로 운치를 더했다.
벽장도 디딜데가 마땅찮아 버둥거리고 올라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겨울엔 가래떡을 뽑아 물에 담구어 보관했고
날고구마나 곶감들 주로 먹거리등을 보관하는데 필요한 공간이었다.
벽장에 올라가면 주로 할머니의 소지품들이 있었는데
가장 소중히 간직한 것은 두루말이형태의 차용증서들이었다.
가끔은 내게 하명하시어 꺼내서 한장 한장 확인 작업을 하셨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은 글자를 모르시는 할머니께서
차용증서의 주인을 확실하게 아신다는 것이었다.
할머니 살아생전에 원통해 하시던 말씀이
"내가 글만 알았으면 김활란이 뺨을 치고도 남는다...."고
어린 나는 "김활란이가 도대체 어떤사람인가"하고 퍽도 궁금했다.
개화기 신여성으로 일제강점기때 친일행적으로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엔 많은 여성들이 우러러보는 여성 선각자임엔 틀림 없었나보다.
생몰년대가 궁금해서 얼마전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우리할머니보다 몇년 늦게 태어나서 몇년 사시다가 타계 하신분이다.
동시대 분이었으니 할머니가 한의 품으실만도 하셨겠단 생각이 든다.
못배운걸 한하시며 길눈이 밝고 총기가 좋은 나를 예뻐하시며
멀리가는 곳엔 늘 앞장세워 다니셨다.
덕택에 어린나이에 연회장에도 가보고
친척집의 애경사에도 참석하며
할머니의 지팡이와 눈이 되어 웬만한 지리는 뚜르르 꿸 정도였다.
할머니는 내가 어슴프레 잠이들면
팬티를 벗겨 궁둥이를 두드리며
"에고 내강아지..." 하시면서 철푸덕 철푸덕 안아프게 두들겨 주셨다.
할머니의 손때가 묻어 있던 벽장,
오빠들의 체취가 느껴지던 다락...
다락과 벽장은 신구가 공존하는 나의 무한한 상상의 바다였으며
어머니의 품과 같은 편안한 곳이었다.
어릴적에 숨박꼭질할 때 벽장에 숨어서
어둠에 묻혀 스르르 잔 적이 있다.
삶이 많이도 고단할때엔
어머니의 복중과 같이 편안한 곳에서 사나흘 꿈도 없이 곤한 잠을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