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60년초 국민학교(초등학교)시절
지방에 사시는 친척분이 오셔서 우리집을
'문안에 사는 댁'이라 칭할땐 비록 셋방살이를 살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내마음은 우쭐해하곤했다.
그 당시는 서울의 동서남북 4대문안에 사는 것이
무슨 큰 출세나 한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기때문이었다.
2, 광화문에서 살던 내가 자주 놀러다니던 곳은 가까이에 있던 사직공원과 인왕산이었다.
양말도 못신던 그때 발이 땟국물땀에 미끌어지는 고무신을 벗은듯 신은듯끌면서 인왕산 바위비탈을 잘도 타고 잘도 뛰어다녔다.
이렇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산을타다 집으로 가는길에는 배가고파 길가 빵집의 빵을 침삼키고 바라보며 쓰려오는 배를 달래곤 했다.
이때 빵에 한이 맺혀 성인이된후 한때는 빵 그것도 앙꼬빵(팥앙금빵)을 죽어라고 먹던 때도있었다.
허기를안고 달려온 집에는 때꺼리도 제대로 없던 형편이라
간식커녕은 여분의 찬밥한덩어리조차 없었다.
밥한덩이를 아쉬워하며 김치한점에 냉수 한사발을 마셔 배를 채우고는 변변치 못한 다음때꺼리를 기다려야했다.
3, 이렇게 궁핍한 시절,
공짜로 먹을게 지천으로깔린 곳으로 놀러가자는 동네형들의 말에 솔깃하지 않을 수가없었으니
그곳은 다름아닌 남산이었다.
남산에가면 아카시아꽃이 만발한데 그꽃은 먹는꽃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공짜라는 것은 신의 축복중 가장 큰 축복이었다.
나는 또래아이들과 어우러져 공짜로 마음껏 먹을 것을 제공한다는 대망의 남산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4, 산에 들어서니 사방지천으로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졌는데
난 그때 꽃들이 왜 저렇게 자신의 가지가 휘어지도록 필사적으로 꽃을 피워내는지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 의문은
아카시아꽃을 양손에 가득 움켜지고 입안가득 꽃을 훑어넣어 먹는 기쁨에 정신이 팔려 나도 모르게 잊혀져버렸다.
남산에 핀 그 수많은 아카시아꽃을 누가 하나라도 더 따먹을까봐
가까이에 멀리에 핀 꽃들을 '저건 내꺼야 저것두 내꺼구..'하며 눈으로 찜해놓으며
손에쥔 꽃을 빨리먹기에 바빴다.
얼만큼 먹었을까?
뱃속 밑에서 부터 올라오는 아카씨아향이 조금씩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꽃향기가 역겨워지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조금씩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우리일행들은 탐욕스럽게 움켜쥐었던 꽃뭉치들을 말없이 하나 둘 놓아버리기 시작했다.
풍부하다못해 넘쳐나는 꽃무리들
그걸 다 차지하지못해 아까워하던 덩어리 덩어리 흐드러지던 꽃뭉치들,
우리는 우리 머리위 허공에 무수히 늘어진 아카씨아꽃무리들을 남겨둔채 남산을 내려왔다.
그후 누구도 다시는 남산에 꽃먹으러가자는 말을 하는 아이는 없었다.
5, 이제 아카씨아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왔다.
지금은 그꽃을 따먹겠다고 덤비는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남산엔 아카씨아가 포도송이처럼 덩어리 덩어리 흐드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