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여섯 해를 사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을까.
가정형편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학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어
좌절했었던 사춘기 시절,
결혼은 안중에도 없는데
어쩔 수 없이 현실에 타협해야만 했던 이십대,
그리고 남편도 없는데
생후 칠개월 밖에 안 된 아들녀석을
장중첩으로 수술을 해야만 했던,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애가 다 타 버렸던 일,
겨우 내 집 마련을 하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교통사고를 내버려 빚까지 져야했던 삼십대.
숱한 사연들이 있었겠지만
이 순간 반짝 떠 오르는 아픈 기억의 일부분이다.
자식들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이셨던,
그래서 평생을 자신을 위한 삶은 단 한 순간도 사시지 못하고
마음 고생만 하시다 가신 친정어머니.
그런 어머닐 보며 난
우리 엄마처럼은 절대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나'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겠다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삶은 결코 살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걸 실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이들은 친정어머니께서 모두 키워 주시니
뒤늦게 대학원 공부도 시작하고
난 늘 바쁘게 당당하게 내 일을 즐겼다.
지역사회에서 인정 받을 정도로 점점 내 자신을 키워갔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기어코 추진해 나갔고
가족들 때문에 포기하는 건 거의 없었다.
주말이면 늘
당일이건 일박이일이건 가족 여행을 즐겼다.
차 안에 흐르는 음악에 취해,
차창 밖으로 흐르는 자연에 도취해
느긋한 마음으로 드라이브를 즐기며
특별한 부는 축적하지 못했지만
생활에 찌들려 아등바등 살았단 기억은 없다.
물론 그것은 모두 부지런하고 통 큰 남편 덕이긴하지만
그 땐 몰랐는데
이제는 그런 남편의 배려가 참 고마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같으면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어
쉽게 떠날 수가 없었을텐데...
요즈음 유행하는 유모어 가운데
여성의 삶을 풍자한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속칭 '가장 배 아픈 여자'라던가
'여자들이 부러워 하는 또 다른 여자'라 하던가...
십대엔 얼굴도 예쁜데 공부도 잘하는 여자,
이십대엔 좋은 직장에 멋진 남자와 결혼한 여자,
삼십대엔 그 자녀까지 공부를 잘하는 여자,
사십대엔 남편 직장도 빵빵한데 자녀까지 좋은 대학을 보낸 여자,
오십대엔 자녀도 좋은 직장에다 결혼까지 잘 한 여자...
해가 갈수록 피부에 와 닿게 절실히 느끼는 건
여자의 삶은 그녀 자신보다도
오히려 그 가족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다.
모임에 나온 여자들의 대화엔
그녀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이 묻어 나온다.
젊을 땐 은근한 남편 자랑에-흉보는 듯 하지만 결국은 자랑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은 자식 자랑,
더 나이가 들면 손주 자랑에 열을 올린다던가...
그런 여자들을 보면서 예전엔 피식 웃었었다.
난 저렇게 살진 않으리라.
가족이 아닌 내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멋지게 살리라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이제는 그 옛날처럼 내 삶은 단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 할 자신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입으로는 '안돼'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이미 해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게 몇 번이던가.
'엄마는 역시 외할머니 닮았어.
우리가 해 주라는 건 다 해 주잖아.
아무리 피곤해도...'
한밤중에
둘째녀석이 먹고싶다는 간식을 챙기고 있는
내 등을 토닥거리며 녀석이 하는 소리다.
어느새 난 그렇게
나도 모르는 새에 차츰차츰 변해가고 있었나 보다.
마치 내 어머니가 우릴 위해 하셨던 것처럼...
나도 어쩔 수 없는 내 아이들의 '엄마'라는 걸
한 남자의 '아내'라는 걸
생활 속에서 수시로 느끼며 살고 있는 요즈음,
친정엄마처럼 살지는 않겠다던
젊은 날의 내 다짐은
과연 그 한계가 어디까지일진 모르지만
내 아이들을 위해 하는 모든 것들이
즐겁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나도 천상 어미는 어미인 모양이다.
문득 내 엄마는 우리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즐거워하시며 고생을 사서 하셨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쩌면 그 분의 삶이 '고생'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위로해 보기도 한다.
우리 형제들이
친정어머니의 '희생적인 자식사랑'을 가슴 가득 기억하듯
내 아이들도 훗날
나의 사랑을 그렇게 여겨줄까...
'무늬만 엄마'라는 후배들이 붙여 준 내 별명이
이젠 결코 자랑스럽지 못하단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정말 가족들을 위해 내 시간을 할애해보리라.
내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영양식단을 짜 보고
그들을 위해 좀 더 내 몸을 움직여 보자.
내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묘책을 강구해 보는 건 어떨까...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우리 가족'을 위한 삶.
'행복'이란 게 뭐 별 건가.
어쩌면 그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 또한
나의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