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얼마간 직장 생활을 했었습니다.
직장생활에 어렵게 적응해 가면서 만난 선배언니랑
가끔씩 퇴근후 산책을 가곤 했어요.
직장근처에 대학교 캠퍼스를 한바퀴 돌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우린 행복했던것 같아요.
유록의 숲으로 둘러싸인 교정의 한쪽을 돌아서 걷다 보면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듯했었지요.
가끔은,
일요일 아침 일찍 약속을 만들고는 했습니다.
그 동네에 아담한 산이 하나 있었는데 아침해를 보러 가자는
약속을 하곤 했었습니다.
산 중턱 쯤에 한 이십여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을수 있는 넙적한
'마당바위'가 있었는데 그곳에 서면 바다 한가운데를 가르며
떠오르는 아침해를 잘 볼수가 있었거든요.
아침 6시 30분쯤 해서 마당바위를 오르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체조를 하거나, 바다에 시선을 두고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곤 했었지요.
힘들게 바위산을 올라 마당바위에 올라서면 머지않아 아침해가
바다를 가르고 불쑥 솟아 오르곤 했었습니다.
항상 아침해를 볼수가 있었던건 아니었기에
아침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볼수 있는 날은 빛나는 기쁨으로
하루가 행복하기도 했었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양을 보다가 산을 내려오면 올라올때 어둑하게
침묵하고 있던 산속의 모든것들이 하나씩 깨어나 새롭게
시야를 장식하곤 했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산과 마을을 경계로 산을 돌아 일주도로가 나있었습니다.
아침햇살로 세수를 끝낸 산을 배경으로 일주도로를 걸어 갔습니다.
한참이나 걸려 바닷가 작은 찻집에 도착할때까지 오래 걸어
바다가 보이는 찻집에 첫손님으로 들어갈라 치면
막 문을연 찻집은 밤새 품고 있었던 나무향기를 한꺼번에 내품어
주고 했었습니다. 마루며 벽이며 천장까지 모두 나무로 지은
찻집 이름이 '헤밍웨이'였습니다.
평생 방랑벽을 숨지기 못하고 킬리만자로로,스페인 내전의 현장으로
그리고 바닷가를 배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낭만주의자였고,
바다를 사랑한 사나이였던 헤밍웨이의 작품을 한때 열심히
읽어냈던 저로서는 그 찻집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향기로웠지요.
바다가 보이는 찻집,,,, 아침 햇살이 발갛게 부서지는 바다를
바라보면 안델센의 고향바다를 흉내낸 인어공주상이 그 햇살에 맑갛게
실루엣을 드러 내곤 했었습니다.
찻집은 바다를 모두 불러 들일듯 통유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아직 청소도 덜 끝낸, 이제막 바다가 보이는 유리문의
커텐을 올리고 있는 찻집에선 첫손님인 우리를 위해 찻물을 올려선
커피를 준비해 주고는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요일이면
그렇게 불시에 들이닥치는 상습범이었던 셈이지요.
커피랑 모닝빵한조각이 들려져 오면 이젠 바다를 감상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미 떠오른 해가 서서히 중천으로 떠오르면서 빚어내는
하늘빛의 변화란 늘상 보아도 신기한 것이었으니
일요일 아침마다 똑같은 자리에 앉아 서서히 그 색감을 변화해
가는 아침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늘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닷가 찻집'헤밍웨이'와 선배언니,,, 그리고 마당바위와
아침해가 손에 잡힐듯 선한데, 벌써 2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세월 동안 저는 결혼과 더불어 서울로 떠나오고,
선배언니는 결혼해서 다른지방으로 가고,
그리고 헤밍웨이는 언제였던가요, 심한 태풍으로 부셔져
아직 열리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세월은 가고 그리운 얼굴들도 떠났지만,
추억이 서린 그리운 장소는 그곳에 그냥 있었길 바란게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요?
그래도...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그 아침의 여정을
추억하며 그리움에 젖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운 것들은 너무 멀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