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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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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35


BY 녹차향기 2000-12-26

어제는 모처럼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어요.
크리스마스이기도 하고, 또 금방 한해가 끝나니깐 인사도 나눠야 하니까 연락을 해서 만났지요.
이 친구들은 고등학교 1학년때 한 반이었던 친구들인데, 모두 결혼을 했고, 또 모두 직장을 다니고 있어요.
저만 유일한 백수주부지요...

우리는 모두 삼선교에 위치한 여상을 졸업했었지요.
학교가 비탈진 계곡을 방불케 하는 산언덕에 위치했었기 때문에 여고생의 다리치곤 모두 우람하고, 씩씩하고, 든든해 보였지요.
일명 무다리...
하지만, 모두 중학교 성적이 우수해야 들어올 수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답게 똘똘하고 나름대로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는 학생들이었거든요.
고등학교를 미처 졸업하기 전에 은행이나 투자회사 혹은 대기업으로 취업이 되었고, 지금까지 다니고 있거나 아님 중간에 더 좋은 곳으로 옮겼거나 대학을 졸업하여 교사일을 하는 친구도 있지요.

은행을 다니면서 닥종이 인형 개인전을 열은 적이 있는 경숙이, 외국인 항공회사에 대리로 근무하는 정원이, 내노라하는 은행의 대리가 된 윤심이, 학교 교사일을 하는 혜정이....
모두 평범한 가정주부만은 아니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 애들이 아니라 친구들의 남편이예요.
왜냐면, 경제가 너무 어려워 진 현실이 큰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모두 직장이 위태로운 구조조정 속에 있거나, 혹은 하고 있는 일이 어려운 경제상황에 맞물려 어려움을 겪고 있답니다.

저희집 또한 마찬가지지요.
수년간 한자리에서 하던 장사를 주인이 나가라는 바람에 이렇게 수개월 놀고 있는 남편이 막간을 이용해서 주식에 목돈을 넣는 바람에 된서리를 맞았던 올 여름의 기억은 정말 지울 수가 없지요.
인터넷을 통해 주식을 사고팔던 남편이 춥다며 한 겨울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던 그 파랗게 질려있던 얼굴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려보았지만 이미 엎질러 진 물이 되었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만회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이젠 깡통이 되어버린 구좌만이 남아있어요.

그 일로 충격을 받으신 시어머님과 남편을 달래는 몫은 저에게 돌아왔지요.
무거운 분위기에 아이들도 질려서 할 말을 잃었지만
"자자, 이러구 있지말고 가까운 산이라도 다녀와요. 네? 어머님, 같이 나가요..."
"싫다. 니들이나 다녀와라.."
"어머님, 산에 가서 좋은 정기도 받구요, 슬슬 걸어가면 다리 운동도 되고요... 기분 전환도 할 겸 나가요..."
겨우겨우 달래서 관악산을 몇 번, 예술의 전당 뒷쪽 우면산도 한번 그렇게 다녀왔지요.
헉헉거리며 산길을 오르고 산 위에 올라서 내려다 본 서울시내, 한강줄기, 개미만한 자동차들, 점으로도 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들....성냥갑만하게 보이는 아파트들, 그 속에 갖가지 고민과 걱정으로 살고 있을 모든 중생들....

그렇게 여름을 지내고, 가을을 지내면서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여력을 찾았고 지금은 그 일을 위해 정신없이 남편은 일하고 있어요.
날라간 돈이 억대를 육박하였으므로 우리집은 정신차릴 수 없이 흔들거렸죠.
그래요....나만 겪고 있는, 우리집에만 닥친 시련은 아니었잖아요.
지난 연휴동안에도 은행 합병 때문에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축복은 이미 포기하고 추운 거리에 나앉아 농성을 벌였던 금융인들, 구조조정 때문에 대기자 발령이나 권고사직을 받아야 했던 직장인들의 쓰디쓴 눈물이 성탄절을 얼룩지게 했지요.

국회에선 밤낮없이 싸움과 고성이 오가고, 부랴부랴 내년 예산을 통과시키는 졸작을 감상하는 마음은 서글프기 그지없어요.
다들 무엇들 하고 있는건가요?
내 친구들이 자랑스러운 건, 이런 작금의 현실 속에서도, 축 쳐져 있는 남편들을 따사롭게 보듬으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다는 점이예요.
누군들 그렇게 오래 직장을 다니면 지겹지 않을까요?
육아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을텐데....
오가는 출퇴근 지하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시간강사라는 설움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저는 친구들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어요.
그애들은 백화점에서 파는 기십만원씩 하는 옷은 입지 않았어도, 호화찬란한 저택이나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아도, 남편이 승승장구 승진을 하고 월급을 많이 받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자기희생이라는 값진 노동으로 가족을 보살피고 알뜰살뜰 이끌어 나가면서도 자기의 인생을 소중하게 가꾸고 있는 그 친구들이 전 정말 자랑스러웠어요.
매달 만원이라는 작은 회비로 식사도 하고, 때때로 영화나 연극을 보기도 하며, 집안의 대소사에 축의금을 주기도 하는 우리 모임은 아마 영원히 계속될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결혼초 시집살이로 이혼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제 얘기를 소상히 알고 계신 친구의 엄마께서
"그래.... 한번 뿐인 너의 인생인데, 그렇게 살면 쓰겠니? 이혼하고 싶음 이혼해라...."
제 자신을 친딸처럼 생각하며 말씀해 주신 그 말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그 친구의 엄마를 친구가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참 좋아요.

오늘 초기 화면에 이런 거 떠 있죠?
여자에게 우정은 없다???
없어요?
절대루 그렇지 않지요.
전, 여자의 우정이 때론 남자들의 우정이나 의리보다 더 강하다는 거
보여줄 수 있어요.
그 친구들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도 없었겠지요.

소중한 우정이 영원하길 빌어요.
무척 추워진 날씨,
모두모두 몸단속, 문단속, 바람단속, 불단속 잘 하세요.
윗층에 친하게 지내는 집 아이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는지 온몸에 빨긋빨긋 무엇이 돋아있더라구여.
유행성이라 하니, 다들 외출 후엔 손발 꼭꼭 씻기고, 양치 시키세요.
한 겨울에 조차 얼지않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무서운 바이러스네요.
우리 경제도 그런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걸까요?

모두 평안한 밤이 되세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