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덟이 되기 전에 갖고 싶은 것들, 인터넷에서 음악을 다운받아 들을 수 있는 엠피 쓰리와 이어폰 세트, 항상 휴대가 가능한 전자수첩, 그리고 밀집 냄새가 날것 같은 밍크 색깔의 울 세타.
내가 아직 스물 일곱의 미혼인 아가씨라면 이런 물품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 아이 둘딸린- 활인매장의 게임 코너를 항상 들려야 하고, 계절이 바뀔때마다 신발과 바지는 사이즈를 바꿔줘야 하고, 그에 걸맞게 항상 굶주린 배를 가지고 있는 잠을 자는 것을 내일 벌어질 재미있는 일을 기대하기 위해 어쩔수 없는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쯤으로 이해하는 아이들- 나로서는 확실히 사치인 것이다.
아담이 눈뜰때에서 인가? 뭉크화집과 타자기와 턴테이블과 연결 해 들을 수 있는 카세트 라디오를 19살 아담은 갖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 끝 부분에서 아담은 스무살을 넘기위해 19살이라는 엄청난 성장통을 치룬 후에 이 세가지 물건들을 가질 수가 있었다.
19살은 입시 교육이라는 거대한 아우라로 해방된는 해이다.
시디 플레이어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한손에 맥주 병을 손에 들고 대학로를 거닌다고 누구하나 뭐라 하지 않는다.
지하철 요철이 심한 플라스틱 의자에 곤드레 취해서 쓰러져 있어도 '청춘이구나'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는 나이고,
무소르그스티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들으면 "그 청년 요즘 아이들 답지 않게 진지하구만" 하는 칭찬을 들을 수 있다. H.O.T.를 좋아하건 서태지를 좋아하건 그건 개개인의 문제인 것이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잇고, 버릴 수 잇는 온갖 선택이 가능한 나이다.
문제는 불행이도 선택받은 행복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한다.
설익은 낮잠처럼, 알맞게 퍼진 비엔나 커피위에 생크림처럼, 콩나물 국밥위에 계란 노른자처럼.
서른 여덟살이라는 것은.
오후 일곱시 이후에 집밖에서 혼자 커피라도 마시고 있으면 "집나간 여자"혹은 "혼자 사는 여자"로 생각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어쩔수 없이 감내해야 한다는 나이다.
어쩌다 일년에 한두번 있는 동창회 술자리에서 맥주한잔 마시고 지하철을 타게 되면 "혹시나 남편이 뭐라 하지 않을까? 하면 어때 일년에 한번인데 뭐라 하면 나도 가만있지 말아야지.
하지만 아이들이 엄마 술 냄새 난다고 하면 어쩌지"하고 혼자 상심하고 달래며 이리저리 애태우는 나이다.
클릭B 댄스그룹을 보고 제내들 귀엽지 않니? 하고 옆집 아줌마에게라도 물을라치면 순식간에 이 아줌마 어떻게 된 것 아냐? 주책이야. 짜증나하는 핀잔을 듣는 나이다. 잘못하면 미성년 약취자쯤으로 낙인 찍힐지도 모른다. 그래서 설운도 머리스타일 바꿨어라고 한다면 이 아줌마야 그러니 아줌마 소리나 듣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 중학교 음악 감상 시간에서나 들었던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귀를 달래 가며 듣던지 아니면 말초 신경이나 자극하는 뉴에이지 풍의 피아노 곡이나 들을 수 밖에.
쓸데없는 것들에 좌절과 집착으로 찬란한 청춘기를 탕진햇던 나로서는 서른이 넘으면 난 적어도 소모성 욕망에 대해 자유로와 질줄 알앗다.
그런데 젠장!
이건 604호네 휴가를 어떻게 보내고 왓는지에 나의 행복이 달려 잇고, 702호네가 어떤 신형차로 바꾸고 그 집 여편네가 드디어 중고 차를 하나 물려 받게 되었다는데에 나의 절망이 달려 잇다면 차라리 브레이크 없던 그 시절이 오히려 자유로왓던 것이다.
지금 내가 40을 넘기 위한 성장의식을 치루고 잇다면 - 인터넷에서 음악을 다운받아 들을 수잇는 엠피쓰리와 이어폰세트, 어디서나 메모와 저장이 가능한 전자수첩, 그리고 밀냄새가 날것같은 밍크 색깔의 울셔츠는 성숙한 계절을 맞기위한 이쯤, 서른 여덟의 동반자로 갖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