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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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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가정 방문가다~~~


BY 파도 2000-09-19

아무리 큰 값을 치룬다 해도

난 이 일을 꼭 하고야 말겠다는 다짐에 다짐을 하고

마로니에 거리를 걸어 가면서 생각하고 생각 했다...

이제 처음으로 볼 애들이랑 공부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행동은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랑 이것 저것

생각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선생님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무심코 뒤를 돌아 보니 아가씨가 나를 불렀다

난 돌아 보고 의아한 눈초리로 보는 순간에

아~지난번 지하 교실에서 본 그 아가씨였다

그때는 인사만 하고 나왔는데...

아이구 황송하게도 나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것 이 아닌감?ㅋㅋㅋㅋ

아 이것 어떻게 처신을 해야하는 갑자기 생각이 안났다..

말을 놓을수도 그리고 올리수도 없는 어정쩡한 사황인데...

그 아가씨가 선생님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다시 하는것이 아닌가...

난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아 이것이구나..

정말로 나의 젊음을 여기다 부어야 할곳이 여기구나 ..하면서

난 미소로만 답을 하고 교회로 갔다

그 아가씨는 빨리 와서 교무실에 있는책을

한번 보고 공부를 시작 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왠지 손이 지갑으로 갔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서 그 아가씨에게 2000원을

손에 쥐어 주었다 책을 사 보라고...

그애는 절대로 안받는 다고 한사코 거절을 했지만 ...

난 단호하게 그애의 손에 쥐어 주고 옥상방(그당시의 교무실)으로 향했다..

마음이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지...

그때의 욕심없는 마음이 이제는 다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욕심많고 심통맞은 평범한 40대 중반의 아줌마로 전락해 있다...

분명히 그때도 나이고 지금도 나인데

지금은 그때의 내가 어디로 갔는지ㅎㅎㅎ

그런일이 있고 난후에 난 무서운 선생님이 되어야만 했다

밤잠을 줄여서 힘든 몸을 이끌고

저녁에 공부하는데 시간이 정말로 아까웠다

그래서 난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다

작은 몽둥이를 마련하여 철저하도록 시켜야만 했다 ...

난 사회랑 가정이랑 체육을 맡았는데 ...

내가 맡은 각 과목이 과락(검정 고시는 각 과목에서60점 이상과 40점 까지만 받아야 했다 과락이란 40점 미만을 이야기 한다)

이 나오면 절대로 안된다는 협박과 함께 애들을 몰아 부쳤다

그리고 난 후 저녁11쯤에는 수업이 끝났다...

난 그중에 나이 많은 아가씨들이 가장 애처로웠다

교회옆에 작은골목에 포장 마차가 있었는데

거기로 데려가서 떡볶이도 사주고 튀김도 사주곤 했다...

공부할때에는 무서운 선생님이지만

공부가 끝나면 친구로 아님 나이가 작아도 인생 상담 역활을 했다

낮에는 공장에서 미싱 일을 하고 밤에는 이곳 성베다 교회에서 공부를 하는것이다..

맏이라서 집에서는 그애들의 월급만 바라본다고 하였다

난 내 용돈의 90%가 다 그런 곳으로 들어

갔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나이 많은 아가씨들도 그렇지만

같은 또래 중학교에 가야 할 남자애들이랑 여자 애들도 보면

마찬가지로 마음이 아팠다

애들을 맡아서 한 두달쯤 지났는데

몇명의 애들이 야학을 안 나오는것이 아닌가?

그래서 난 다른 애들과 함께 물어물어

삼양동 골짜기에 있는 남자애집으로 가정 방문

아닌 방문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야학도 같은

동네에 사는 애들이 같이 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애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한 애가 야학을 안오니 전부 셋이였는데 다 안나오는것이었다

그러니 안가볼수 가 없었다..

서울은 다 삐가 번쩍한 집에서 호의호식 하면서

사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집을 난 지금까지도 본적이 없었다

그애집에 갔더니 할머니 한분이 방문을 기대 앉아서

나를 보면서 인사를 정중히 하는것 이 아닌가?

난 황송해서 나도 같이 인사를 하고

남자애를 물었더니 시장에 채소를 할머니 대신 팔러간 것이였다

그애는아버지 어머니가 안계시고

할머니 한분이 시장에서 채소를 팔면서

손주를키우면서 또 의지도 하고 사셨는데...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한발짝도 못 움직 이는것이 아닌가?

그리고 사고를 낸 사람도 그할머니 못지 않게 가난한 사람이라서 ..

치료비는 커녕 아무것도 바랄수 있는 사람이 아니였다나..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내가 늙어서 잘못 하여

넘어졌다고 하셔서 보상을 받을 수가 없는

그런 사황이였는데 그 사고때 뒤로 넘어 졌는데

다리를 못 써신다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 남자애가 학교로 나올수 있는 사황이 아니였다

그남자애는 공부를 잘했다...

지난번에도 언급한바가 있지만

검정고시는 2년단위로 공부하여 시험을 보기 때문에 그남자애는 기초반이였지만

우리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다 사정이 그러니 그애가 야학을 나올수가 없었다..

난 할수 없이 그냥 돌아 오면서 다른

애들은 보내고 계란을 열개 사서 그애집에 주고 왔다

그당시 야학에는 학생선생님들이 많았다 사대. 방송과 의대 약대.경제과..무역과 정치외교학과등등...

참으로 이상한 일은 부자 애들이 아니고 다들

그냥 그냥 먹고 사는 지방에서 온학생들이 야학 선생님을 했다 (개중에는 서울에 사는 부자 아이도 있었다 그렇지만 몇명 되진않았다)

비록 부자는 아니였지만 맘이 부자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난 고민을 하고 야학으로 돌아와서

그남자애의 일을 해결을 해야 했는데 여간 고민이 아니였다

학생 선생님들과 의논 끝에 신부님에게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모두 신부님 방으로 찾아 갔다

신부님은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선뜻 나서서

국비로 운영하는 병원에 가도록 주선을 해주신다는것 아닌가?

난 너무나 기쁘서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몇칠후에 난 그 삼양동 집을 다시 찾았다 신부님이랑...

그리고 그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셨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그 남자애가 야학을 다시 나오기 시작 했다...

세월이 지나서 그 남자애는 학교도 가고 시험도 보고 하여

지금 수도권 어느 경찰서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장가도 가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후문을 듣고 있다..

이 야학 이야기는 시작 하면 끝이 없다 ..

지금도 그 모임이 계속되어서 일년에 한번씩 만난다 ..

그당시의 선생과 제자로..정말 흐뭇하고 정겨운 만남이 이세상에서 또있을까?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